대빈창을 아시는가

귀토야생기(歸兎野生記)

대빈창 2015. 5. 7. 02:09

 

 

토진이의 출신이 밝혀졌습니다. 갯벌에서 상합을 캐 호구지책을 삼는 대빈창 마을의 아주머니 한 분이 애완용 토끼 한 쌍을 길렀습니다. 잿빛토끼 수놈이 죽자 토끼풀 뜯기가 번거로웠는지 아주머니는 암놈인 흰토끼 토진이를 대빈창 해변 제방 끝머리에 풀어 놓았습니다. 잘 알다시피 토끼는 웬종일 풀을 오물거립니다. 다 자란 토진이지만 애완용이라 집토끼의 절반 크기 밖에 안합니다. 생명을 이어갈까 염려스러웠습니다. 토진이는 용케 마른 풀을 씹으며 겨울을 났습니다. 토진이가 사람 손은 벗어나 야생의 삶을 산 지 일 년이 넘었습니다.

1일. 노동절 연휴를 맞아 가족들이 섬을 찾았습니다. 새끼토끼 한 쌍이 누이 손에 들렸습니다. 열흘 전 강화도에 나간 김에 풍물시장에 들러 토끼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토끼는 오일장이 되어야 시골 할머니들 손에 나온다고 합니다. 저는 누이에게 전화를 겁니다. 김포 오일장에 들러 애완용 토끼 한 쌍을 구입하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애완용은 보이지 않고, 집토끼는 있다고. 두 녀석이 섬에 들어온 날 비 예보가 있었습니다. 녀석들을 봉당에 박스 째 옮겨놓고, 텃밭의 시금치와 묵정밭의 씀바귀를 한아름 뜯어 먹이로 던져주었습니다. 녀석들은 낯가림이 없습니다. 종이박스를 뛰쳐나와 제 세상을 만났다는 듯이 봉당에 오줌과 똥을 지리며 폭풍 흡입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2일. 오후 날이 개면서 햇살이 퍼졌습니다. 종이박스에 녀석들을 담아 대빈창 해변으로 향합니다. 해변 제방 끝머리 토진이의 영역에 녀석들을 풀어 놓았습니다. 으름덩굴 새잎에 얼굴을 묻고 정신없이 신선한 풀을 섭식합니다. 활발한 노란 녀석이 잡목 숲으로 깡충깡충 내달리자 잿빛 토끼가 뒤따르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역진화의 고달픈 도정에 나선 토진이에게 도반이 생겼습니다. 이제 아침저녁 산책마다 녀석들의 안부를 묻는 일만 남았습니다.

한 시간 앞서 저녁 산책에 나섰습니다. 바닥에 깔린 으름덩굴 주변을 살펴도 녀석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 갔을까요. 제방길에서 산자락으로 내려섭니다. 그때 후다닥 노란 녀석이 냅다 줄행랑을 놓습니다. 이어 잿빛 녀석이 다른 방향으로 잽싸게 도망칩니다. 녀석들의 털빛은 보호색으로 눈에 뜨이지 않았습니다. 두 녀석 모두 동작이 날랩니다. 야생 적응을 걱정 안해도 될 것 같습니다. 반환점을 되돌아 나오면서 풀숲을 기웃거렸지만 녀석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마치 보이지 않던 토진이가 안부 인사를 하는 것처럼 산비탈 덩굴 숲에서 머리를 빼꼼히 내밀었습니다.

3일. 먼동이 터오는 이른 시각. 아침 산책에 나섰습니다. 제방 끝 막다른 기암절벽에 막힌 삼태기 지형. 애완용 흰 토끼 토진이와 새끼 토끼 두 마리 모두 보이지 않습니다. 반환점을 돌면서 멀찍이 산자락을 올려다보자 토진이가 관목덩굴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새끼 토끼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저녁 산책. 신록이 우거져 갈수록 토끼가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눈을 크게 치켜뜨며 산비탈을 살피자 토진이가 보였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서니 잿빛 토끼가 후다닥 달아났습니다. 일 년 간 낯을 익힌 토진이는 급할 것 없다는 듯 어슬렁거리며 여유를 부립니다. 집에 돌아와 누이에게 물으니, 역시 잿빛 녀석이 수놈이었습니다. 다른 암놈인 노란 토끼는 어디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까요.

4일. 아침산책, 제방 포장을 하고 남은 사석 더미옆 공터에 토진이와 노란 녀석이 사이좋게 풀을 뜯고 있습니다. 수놈 잿빛 토끼는 어디 있을까요.

“토끼 보았냐.” 산책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가 빼먹지 않고 꼭 묻습니다.

“예, 토진이가 새끼토끼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제 됐다. 토진이가 판 굴에 새끼 토끼들도 같이 살거야.” 어머니는 당신의 집을 마련한 것처럼 좋아하셨습니다.

저녁 산책. 제방 끝 FRP 선외기 폐선이 버려졌습니다. 폐선 이물 앞 그늘아래 모래바닥에 토진이가 있었습니다. 토진이는 다가가도 절대 당황하지 않습니다. 토진이와 눈을 마주치는데 노란 토끼가 급히 다가오다 방향을 틀더니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제가 일어서자 토진이가 산그늘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자리를 옮깁니다. 토진이는 저의 시선을 유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알았습니다. 녀석들의 아지트는 폐선 뱃바닥이었습니다. 배앞 모서리의 마른 잡풀이 교묘하게 뚫린 선체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노란 토끼는 구멍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토진이는 대견하게 새끼토끼들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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