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의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아침저녁 산책에서 녀석을 만난 지 일 년을 넘어섰습니다. 반가움에 그냥 ‘나비야! 나비야!’하고 부르면 녀석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이미지에 나타난 것처럼 녀석의 특징은 꼬리에 있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의 고지대에 산다는 눈표범처럼 꼬리가 아주 튼실합니다. 달리는 속도의 몸의 중심을 잡는 키 역할로 굵고 탐스런 꼬리가 받쳐줍니다. 녀석의 눈·코·입·귀 이목구비는 오밀조밀하여 귀엽기 그지없습니다. 산책에서 만나면 녀석은 제 양 정강이를 번갈아 비비며 반가움을 표합니다.
봉구산 자락을 따라가는 옛길에 올라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어름이면 고구마밭, 고추밭, 다랑구지를 지나는 오솔길에서 녀석은 어느새 저의 뒤를 쫓아 앞질러 달려갑니다.
“나비야, 나비야!”
지나간 겨울, 어스름이 밀려드는 저녁 산책. 정강이에 얼굴을 부비는 녀석을 안아들었습니다. 팔에 안긴 녀석은 얌전했습니다. 저는 녀석을 안고 집 뒤 고갯길을 올라 마당에 들어섰습니다. 산책에서 늦는 아들을 마중 나오려 현관문을 밀치는 어머니를 보고 놀란 녀석이 저의 팔뚝을 할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놀란 녀석이 팔뚝에 콩알만한 똥을 지린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때 우리집 봉당에 뛰어 든 큰 쥐의 소란스러움에 저의 신경은 날카로워졌습니다. 나비를 투입하여 쥐를 쫓아내겠다는 계획은 어이없는 돌발상황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녀석은 그런 일이 언제 있었다는 듯이 저의 산책 길동무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이 궁한 추운 계절. 녀석은 가끔 옆집에 나타나 개밥을 훔쳐먹고 사라졌습니다. 마음씨 고운 형수는 녀석의 몫까지 사료를 수북하게 개밥그릇에 쟁였습니다.
기온이 더 내려가자 녀석은 대빈창 마을 첫 집을 거처로 삼았습니다. 주인은 겨울 한 철 대처의 자식에 몸을 의탁하는 한시적 빈집입니다. 해변 빈 간이천막 가게까지 따라온 녀석을 저는 손짓을 크게 하여 쫓습니다. 영리한 녀석은 아쉬운 표정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해변 제방길 끝에 사는 토진이를 보호하기 위한 저의 어쩔 수 없는 ‘따뜻한 외면’입니다. 봄이 돌아왔습니다. 빈집의 주인도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녀석이 한 달째 보이지 않습니다. 녀석은 어디로 갔을까요? 삶터를 찾아 떠난 것으로 좋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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