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환상수족
지은이 : 이민하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시집은 「시인의 말」 두 편, 4부에 나뉘어 실린 59 시편, 문학평론가 허윤진의 해설 「색채의 배합에 대한 연구」, 「기획의 말」로 구성되었다. ‘20세기 후반기에 출판되었다가 다양한 사연으로 절판되었거나 출판사가 폐문함으로써 독자에게로 가는 통로를 차단당한 시집’(152쪽)이 《문학과 지성 시인선 R》을 통해 복권되고 있다. 현재까지 복권(?) 시리즈는 9권까지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그중 7번째다. 시인의 첫 번째 시집으로 2005년 〈열림원〉에서 초간본이 나왔다. 10년 만에 다시 독자를 찾았다. 표제시 「환상수족」의 각주는 - *환상수족phantom limb : 사고나 수술 등으로 수족이 절단된 후에도 없어진 부위가 아직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증상. - 이다.
R 시리즈로 유하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황지우의 『나는 너다』 그리고 이 시집을 손에 넣었다. 나는 1996년 세계사에서 초간본이 나온 박상순의 『마라나, 포르노만화의 여주인공』이 재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출판사정 내막을 알 수없는 내게 시집 재출간이 자꾸 연기되는 것이 안타까운 뿐이다. 기대하는 심정을 한 번 갖다보면 조바심이 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난해하기 그지없는 시집을 뒤적이다, 책장에 꽂힌 시집들을 일별했다. 이럴수가. 황병승의 『육체쇼와 전집』, 김민정의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까지. 소위 ‘미래파’ 시집이 3권이나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시인·문학평론가 권혁웅이 2005년 낮선 시풍으로 무장한 일군의 30 ~ 40대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미래파’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미래파는 90년대 서정시의 대척점으로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혁신적인 작품을 일컫기도 하는데 ‘새로운 흐름’VS '소통부재의 난해시‘라는 미래파 논쟁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도로 한복판에 머리가 잘린 버드나무 한 그루 / 가지마다 길이 뻗쳐오르고 털이 많은 녹색 새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흐물거리는 나무의 몸통, 그 위로 사람들의 지문 자국이 뒤덮고 있다 / 드문드문 떨어져 나온 나무껍질 같은 손바닥들이 길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보라색 태양이 벤치 위에 앉아 있고 구백구십구 개의 손잡이가 여백을 메우고 있다 / 그리고 깃발처럼 나무의 몸통에 꽂혀 펄럭이는 바짓가랑이
가까이서 보면 왼쪽은 맨발, 오른발엔 낡은 신발을 끼운 검붉은 바지의 하반신 하나가 가지처럼 뻗어 있다 / 그는 허리 아랫부분을 나무의 몸통 속으로 마저 밀어 넣고 있는 중이다
두 번째 시 「입구」(14쪽)의 전문이다.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은 ‘말놀이로 세계건축의 기초공사’를 마쳤다고 평가받았다. 시편들은 언어적 유희를 ‘의식적 자기분열과 환상의 형태’로 나타냈다. 하지만 나는 미래파에서 여전히 소통불화의 난해함에 기가 질렸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나는 위 시에서 월동준비로 몸통만 남은 모든 가지가 잘려버린 도시 가로수의 비애를 읽는다. 지문 자국은 잘린 가지에 드러난 나이테이며, 당연히 손바닥들은 낙엽이고, 바짓가랑이는 잘린 가지에 뒤집어씌운 보온용 헝겊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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