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네모

대빈창 2015. 11. 23. 07:00

 

 

책이름 : 네모

지은이 : 이준규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저녁이 온다.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밤이 오고 겨울이 오고 봄이 온다. 너는 웃고 나도 웃고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숲에 이른 문장을 보리라. 몇 개의 문장을 더 쓰고 어둠이 오면.

 

서시에 해당하는 「문장」(11쪽)의 전문이다. 시인은 시집을 잇달아 펴냈다. 『네모』(문학과지성사)와 『반복』(문학동네) 이다. 나는 낯선 시인의 낯선 시들을 일별하다, 그래도 표지그림 시인의 컷이 낯익은 시집을 집어 들었다.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은 부 구분 없이 72편의 산문시가 실렸다. 하나같이 시들이 낯설고 기이했다. 그것은 시라면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3無에서 연유한다. 시들은 내용, 형식, 수사가 없었다. 산문시는 내용도 형식도 없고, 수사도 배제했다. 모든 시가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있다”와 “있었다”와 같은 단순진술만으로 여백들이 시의 맥락을 형성했다. 시집의 구성성분은 모두가 짧고 간결하다. 제목은 5음절 이내였고, 시편의 글줄은 짧다. 시인의 말은 “슬픔도 남기고 싶었다.”일 뿐이다. 속면지의 ‘지혜에게’는 고교 때 만난 시인의 첫사랑으로 아내의 이름이라고 한다.

“시집 전부가 한 편의 시 같다. 72편이 한 편이고 한 편 속에 72편이 있는 것만 같다. 여러 얼굴을 가진 단 하나의 장면이거나, 여러 문장으로 돌아다니는 하나의 문장으로 비치기도 한다.”(105 ~ 106쪽) 시인·문학평론가 이수명의 해설 「호모 트리스티스homo tristis」의 한 구절이다. 그러니까 하나하나의 시편들은 퍼즐조각인 셈이다. 시인은 말했다. “나의 시는 구조를 분석하기보다 시의 파편들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를 받아들이면 된다.” 마지막은 표제시 「네모」(13쪽)의 전문이다.

 

전축 앞에 서 있었다. 마치 하나의 네모처럼. 전축 앞에 거울이었다. 전축 앞에 서 있었다. 전축은 네모. 음악은 없었다. 물과 바람은 없었다. 나귀도 없었다. 전축 앞에 서 있었다. 너는 네모. 어떤 전축도 없었다. 아무 전축도 없었다. 나는 네모 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