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당부
지은이 : 신경현
펴낸곳 : 한티재
오래된 어머니의 일기는 / 몇 번을 읽어보려 해도 / 자주 눈앞이 흐려진다 / 받침 빠진 글자들 사이로 / 툭하고 떨어진 눈물이 / 아직까지 맺혀 있고 / 달라붙은 가난을 등짐처럼 지고 가는 / 구부정한 어깨가 / 욱신거리며 내 속으로 들어온다 / 꾹꾹 눌러 쓴 어머니의 주름이 / 누렇게 색이 바랜 채 / 가라앉아 있는 밤, / 나는 / 읽을 수 없는 어머니의 말들을 / 눈뜬 봉사처럼 /들여다보고만 있다
「읽을 수 없는 말들」(42쪽)의 전문이다. 3부에 나뉘어 50편이 실렸는데, 망막에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시였다. 어머니는 글을 모르신다. 팔십 평생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나는 왜 어머니에게 글을 깨쳐드릴 생각을 못 했을까. 뼈저린 후회가 밀려왔다. 퇴원하신지 4개월 보름이 되어 가건만 어머니의 불편한 거동은 차도가 없으시다. 밖은 지팡이에 의지해 간신히 몇 걸음을 옮기시고, 집안은 보조 보행기에 몸을 의탁하신다. 다행이나마 어머니는 진지를 잘 드셨다. 막내아들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주려는 사려일 것이다.
〈한티재〉에서 펴낸 시집이라 무턱대고 손에 넣었다. 나는 그만큼 신생 출판사가 마음에 들었다. 변홍철의 『어린 왕자, 후쿠시마 이후』에 이어 두 번째 시집이다. 생각지도 않게 좋은 시집을 만났다. 노동자 출신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었다. 시인은 대구와 울산에서 용접 일을 했고, 대구성서공단노동조합에서 비정규직·이주노동자의 일을 도왔다. 지금은 지리산 자락으로 귀촌했다. 시편들은 사라져가는 농촌 풍경과 농부들에 대한 애잔함을 그렸다. 시인은 표제시 「당부」(34 ~ 35쪽)에서, - 해가 지는 돌각담 / 바람의 숨소리 / 다랑논의 이마 / 당산나무의 부르튼 수피 / 경운기 소리 / 마른기침 소리 / 굵은 땀방울 / 뻐꾹새 우는 밤 / 흙물 든 바지 / 밥 냄새 / 겨울 들판 / 아궁이 속 나무 타는 소리 - 를 ‘오래 보아 두라’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시집 말미의 의례적인 문학평론가나 동료 문인의 해설은 보이지 않았다. 발문은 진보·개혁 기독교 단체인 해방과 나눔의 희년공동체 대표 박수규의 「답장」이고, 추천사는 사회연대 쉼터 인드라망 집행위원장 장병관의 「분노를 넘어서는 사랑」이다. ‘인드라망’은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 모두를 환하게 밝히라는 불교 용어다. ‘사회연대 쉼터 인드라망’은 전북 남원 만행산(905m) 귀정사에 둥지를 틀었다. 인드라망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활동가, 국가폭력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 새로운 사회의 씨앗을 준비하는 이들의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열린 공간이다. 쉼터지기 중묵 처사는 말했다. “ 쉼터는 몸과 마음을 쉬는 곳이기도 하지만 사회를 더 좋게 바꾸고 싶은 사람들이 귀농·비영리단체·노동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고립감을 해소하고 서로 융화하는 곳”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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