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가만히 좋아하는

대빈창 2015. 12. 2. 07:00

 

 

책이름 : 가만히 좋아하는

지은이 : 김사인

펴낸곳 : 창비

 

쓰다 버린 집들 사이로 / 잿빛 도로가 나 있다 / 쓰다 버린 빗자루같이 / 나무들은 노변에 꽂혀 있다 / 쓰다 버린 담벼락 밑에는 / 순창고추장 벌건 통과 검정 비닐과 스티로폼 쪼가리가 / 흙에 반쯤 덮여 있다 / 담벼락 끝에서 쓰다 버린 쪽문을 밀고 / 개털잠바 노인이 웅크리고 나타난다 / 느린 걸음으로 어디론가 간다 / 쓰다 버린 개가 한 마리 우줄우줄 따라간다 / 이발소 자리 옆 정육점 문이 다시 열리고 / 누군가 물을 홱 길에 뿌리고 다시 닫는다

먼지 뽀얀 슈퍼 천막 문이 들썩 하더니 / 훈련복 차림의 앳된 군인 하나가 / 발갛게 웃으며 / 신라면 다섯개들이를 안고 네거리를 가로지른다

 

「겨울 군하리」(29쪽)의 전문이다. 시인은 어느 겨울 김포시 월곳면에 발걸음을 했다. ‘노루목 지나 심학산 넘어가면 / 조강 나루’ 「해동 무렵」(57쪽)의 1연이다. 조강(祖江) 나루를 만나려면 민통선 마을 보구곶리(甫口串里)를 찾아야 한다. 보구곶리는 월곳면 소재지 군하리를 거쳐야만 만날 수 있다. 임진강을 맞아들인 한강이 강화바다와 만나는 지점이 조강이다. 평론가 임우기가 말한 시인의 능청과 딴청은 ‘부산 금강공원’에서 다시 조우한다. 「뉴욕행」(78 ~ 79쪽)에서 ‘500원짜리 뺑뺑이 비행기에 / 딸년을 실어’놓은 시인은 「다시 금강공원에서」(106 ~ 107쪽)에서 ‘몇해 지나 새끼들 안부도 모르는 채 / 먹는지 거르는지 애써 모르는 채’ 혼자 다시 찾아왔으나 딸아이 좋아하던 뺑뺑이 비행기는 없었다.

시집은 2부에 나뉘어 모두 67편이 실렸고, 해설은 임우기의 「집 없는 박수의 시」로 부제가 ‘김사인 형의 두번째 시집 출간에 부쳐’다. 무려 40여 쪽 분량의 글은 시작과 마무리가 정감 있는 편지글이다. 평론가 후배의 선배 시인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평론가는 시인과 백석의 시에서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운명 지어진 시인’의 삶에 대한 연관성을 밝혔고, ‘힘없고 소외된 자들의 삶에 대한 실천적이고 간절한 연대감 속에서 체득한 문법’에서 故 윤중호 시인과의 친연성을 찾았다. 애도시 「윤중호 죽다」가 실렸고, 두 시인은 이웃한 충북 두메산골이 고향이다. 윤중호는 영동이고, 김사인은 보은이다.

참 좋은 시집을 만났다. 가끔 찾는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의 게시판 詩窓에서 제목이 유다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가 눈에 뜨였다. 오랜만에 접한 시인의 이름에서 나는 폭력과 저항의 시대 80년대와 노동해방문학을 떠올렸다. 시인은 1989년 3월 창간된 『노동해방문학』의 발행인이었다. 당연히 시인은 수배, 도피, 투옥의 세월을 살았다. 19년만에 세상의 빛을 본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 『밤에 쓰는 편지』가 1987년에 나왔다. 오랜 시간 매만져진 시편들에서 시인의 사회적 약자를 향한 연민과,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는 따뜻한 마음을 읽었다. 근간에 나온 세번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가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펼치지 못한 시인의 시집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 한 구석이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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