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귀토야생기(歸兎野生記) - 5

대빈창 2015. 11. 10. 06:57

 

 

 

산천초목이 성글어가는 계절입니다. 엊그제가 입동이었습니다. 꼬마토끼 토진이가 폐선 앞 모래바닥에서 해바라기를 합니다. 낙엽 진 아까시잎이 땅바닥을 온통 덮었습니다. 폐선 앞자리만 둥그렇게 모래가 드러났습니다. 짧아지는 해지만 오후 내내 온기로 데워진 모래에 토진이가 배를 깔고 편하게 누워 몸을 덥힙니다. 한여름 무더위와 진드기의 극성을 이겨내고 녀석은 두 번째 겨울맞이를 준비합니다. 작년 초봄 녀석을 처음 만났습니다. 시든 초목에 연두빛 생명이 차오르기 전이었습니다. 인기척에 놀란 녀석이 제방도로 포장공사 돌 틈에 몸을 숨겼습니다. 온통 흰 몸뚱이에 배트맨의 로빈처럼 안경을 쓴 것처럼 눈 주위만 까만 녀석을 처음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머물렀습니다.

겨울을 나는 동안 녀석은 가끔 눈에 뜨였습니다. 엽록소가 빠진 시든 풀줄기로 목숨을 이어가는 녀석이 애틋하지만 기특했습니다. 드디어 신록이 생동하는 오월. 무사히 겨울을 이겨낸 녀석에게 친구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집토끼 남매 토돌이와 토순이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남매는 역진화에 실패했습니다. 누이 토순이는 한여름 불현 듯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상합 캐는 할머니들 말에 따르면 녀석은 진드기의 희생양이 된 게 분명합니다. 오빠 토돌이는 덩치가 컸지만 못 말리는 호기심이 문제였습니다. 해변을 찾는 피서객이 뜸해지자 녀석은 활동 근거지인 해변 제방길 끝머리를 벗어나 무려 0.5㎞나 떨어진 야영장에 모습을 곧잘 드러냈습니다. 차츰 눈에 띄는 횟수가 뜸하더니 어느 날부터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녀석이 만약 살았다면 반대방향 제방 끝머리인 구렁텅(바닷가 굴밭) 절벽 부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발붐 발붐 나왔다가 되돌아가지 못했구나.”

어머니의 말씀이십니다. 녀석의 행동양태는 되돌아서지 못하고, 무조건 전진입니다.

대기의 푸른 기운이 점차 짙어갑니다. 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고, 봉구산 너머의 미세한 빛이 감지되기 시작하는 이른 시각. 저 멀리 마른 산수 속에서 희끄무레한 물체가 움직입니다. 분명 토진입니다. 녀석은 점차 엷어지는 어둠 속에서 강아지풀의 마른 씨앗을 오물거렸습니다. 찬 계절을 이겨내기 위한 단백질 섭취인지 모르겠습니다. 엊그제 이틀동안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찬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한번 올 때마다 기온은 빠르게 떨어질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토진이에게 응원을 보내며 박수를 칩니다. 녀석은 틀림없이 올 겨울도 너끈히 이겨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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