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이젠 없는 것들 1
지은이 : 김열규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책은 한국학의 거장 김열규(金烈圭, 1932 - 2013) 교수가 ‘글로 풀어낸 민속박물관’이었다. 1991년 정년을 6년 남겨두고 서강대 교수를 내려놓고, 인제대 교수를 받아들였다. 고향 경남 고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고향의 자연 속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한 해 한 권 이상의 책을 펴내며 왕성한 필력을 과시했다. 『이젠 없는 것들 1, 2』는 저자가 세상을 떠난 해에 출간되었다.
한국인의 질박한 삶의 궤적에 천착한 노학자는 열두 마당 백서른 두 가지 주제로 나뉘어 이젠 없어서 사무치도록 그리운 우리네 풍경과 정서들을 두 권의 책으로 묶었다. 사진작가 이과용은 2년여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103컷의 사진자료를 모아 현장감을 더했다. 1권의 여섯 마당은 마을 주변의 풍경과 전통가옥과 공동체 규약, 집안 식구들의 아련한 정경, 어른이 되는 과정, 몸단장과 군것질거리가 실렸다. 책갈피를 넘기면서 나는 고즈넉하고 애달픈 추억 속에 잠겼다.
‘지금부터 한두 세대 전만해도 시골의, 그나마 동네라 불릴 만한 정도의 곳에는 작은 가게가 하나씩 있었다. 그걸 어디서나 구멍가게라고 했다.’(40쪽) 나의 국민학교 시절, 학교 정문 길 건너에 구멍가게가 있었다. 우리 동네 나의 동갑내기는 유달리 많았다. 항상 네다섯 명이 함께 걸어서 등하교를 했다. 어느 날 한 녀석이 손 안에 귀하디귀한 오원짜리 동전을 자랑하며 구멍가게로 향했다. 개구쟁이들은 우! 하고 몰려갔다. 할머니가 뎀뿌라(고구마 튀김)를 대바구니에 들고 나오셨다. 하필이면 바구니에 구멍이나 뎀뿌라가 바닥에 떨어졌다. 먹새가 사나웠던 촌놈들은 먼지가 묻었건 말건 손에 잡히는 대로 뎀뿌라를 집어들로 신작로를 내달렸다.
‘부엌 뒤의 높다란 담장을 끼고 있는 장독대는 낮은 벽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그 자체의 특별난 공간이 되게 둘레와는 구별 지어서 얕은 담을 쌓은 것이다’(71쪽) 김포 한들고개 우리집 장독대는 담이 아니라 둔덕 경사가 자연스레 경계를 지었다. 장독대 너머는 뒷산이었는데, 아름드리 참나무와 늙은 뽕나무가 울타리를 대신했다. 어머니는 매년 장독대에 우수수 떨어지는 상수리를 모아 도토리묵을 쑤었다. 어느 해였던가. 머리에 예쁜 깃을 단 딱따구리가 요란한 타격음을 내며 뽕나무에 구멍을 뚫었다. 어린 나에게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몇 세대 전, 초등학교 학생들은 책 보따리를 등허리에다 메고 다녔다. 그런 모양으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166쪽) 나는 국민학교 3학년까지 책보를 메고 다녔다. 남학생은 어깨 죽지에 비스듬하게 메었고, 여학생은 등허리에 메었다. 신작로를 뛰어다니다보면 양철필통 속 연필은 곯게 마련이었다. 변또 반찬의 김치 국물이 흘러 책술이 벌겋게 물들었다. 비를 맞은 책보의 책은 책갈피가 두 배로 부풀었다. 아궁에 불을 때고 아랫목에 널어 말렸다. 책장이 우글쭈글했다.
책을 잡고 까치밥의 의미를 새롭게 알았다. 추운 계절 날짐승들의 먹을거리를 남겨놓은 선조들의 전통생태 사상으로 그동안 나는 좋게 생각했다. ‘마지막 남은 한 알이 다음 해 봄에 더 많은 감꽃을 피우게 하고, 그래서 보다 풍족한 열매가 달리게 하는 데 큰 구실을 하게 될 거라고 옛사람들은 믿었다.’(208쪽) 마지막은 머리말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에 인용된 김소월의 시 「가는 길」의 전문이다.
그립다 / 말을 할까 / 하니 그리워 // 그냥 갈까 / 그래도 / 다시 더 한 번··· //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 서산에는 해 진다고 / 지저귑니다 // 앞 강물, 뒷 강물 / 흐르는 물은 /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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