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느림보 마음

대빈창 2012. 10. 24. 06:28

 

책이름 : 느림보 마음

지은이 : 문태준

펴낸곳 : 마음의 숲

 

山竹 사이에 앉아 장닭이 웁니다

묵은 독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 애처롭습니다

구들장 같은 구름들은 이 저녁 족보만큼 길고 두텁습니다

가 바람을 빚어낼까요

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산죽의 뒷머리를 긁습니다

산죽도 내 마음도 소란해졌습니다

바람이 잦으면 산죽도 사람처럼 둥글게 등이 굽어질까요

어둠이, 흔들리는 댓잎 뒤꿈치에 별을 하나 박아주었습니다

 

‘수런거리는 뒤란’의 전문이다. 시인의 데뷔시집 표제작이다. 시인은 현재까지 5권의 시집과 한권의 산문집을 펴냈다. 내 책장에는 시인의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과 ‘맨발’ 그리고 ‘가재미’가 꽂혔다. 새삼 묵은 시집을 펼쳤다. 나는 '뒤란'이라는 단어에서 불현 듯 어릴 적 추억 한 토막을 건져냈다. 시인의 첫 번째, 두 번째 시집을 한꺼번에 손에 넣었다. 세 번째 시집 ‘가재미’가 출간되자 나의 마음은 급해졌다. 네 번째 시집 ‘그늘의 발달’ 과 근간 시집 '먼곳'은 몇 번 가트에 던졌으나 웬일인지 여적 미적거리고 있다. 그리고 시인의 첫 산문집인 ‘느림보 마음’을 펼쳐 들었다. 책은 ‘느린 마음’, ‘느린 열매’, ‘느린 닿음’, ‘느린 걸음’ 4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15개의 글이 묶여 한 장을 이루었으니, 이 책에는 모두 60개의 글이 실렸다. 어린 시절 고향 풍경과 아버지와의 추억 등 낮은 목소리로 일러주는 시인의 말에 귀 기울이다 보면 독자들을 아련한 옛 추억에 시나브로 잠기게 된다.

내 옛집의 캄캄한 부엌 생각도 났습니다. 흙부뚜막엔 큰 솥이 걸려있었고,(90쪽) ‘밥상을 차리는 일’의 한 구절이다. 내가 태어난 언덕 위 초가집 부엌은 한낮에도 어두웠다. 바람벽으로 쌓은 흙벽돌이 무너져 내려 멍석으로 대충 가렸다. 북풍한설에 어머니는 곱은 손을 부비며 어린 자식들의 아침 끼니를 이으려 찬물에 손을 담갔다. 황사 때면 뿌연 흙먼지가 선반에 올려놓은 사기그릇을 벌겋게 물들였다. 어머니는 점심 도시락 반찬에 매번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반찬은 매일 같았다. 짠지의 물기를 짜내고 고춧가루에 버무린 짠지무침이었다. 허름한 거적문을 밀치면 뒤란으로 이어졌다. 하루도 어머니의 행주질이 멈추지 않았던 장독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장독대를 덩치 크고 오래 묵은 참나무와 뽕나무가 내려다보았다. 초등학교 상급반이던 어느 해 여름. 얼기설기 얽힌 뽕나무 가지에 날아 온 딱따구리를 옆집 형이 맨손으로 잡은 기억이 또렷하다.

아버지는 쇠죽을 끓이던 큰 가마솥에 마른 볏짚으로 씻어내 맑고 찬 산골 물을 붓고, 장작불을 넣어 목욕물을 준비하셨습니다.(99쪽) ‘따뜻한 화로 같은 고향’의 한 구절이다. 고목 향나무 3그루가 그늘을 드리운 마을 공동우물에서 물지게로 힘들여 길어 온 물을 어머니는 가마솥에 쉬! 소리를 내시며 쏟아 부었다. 새끼들 목욕물이었다. 나는 거웃이 비춰서야 어머니가 때를 밀어주는 목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커다란 함박에 김이 설설 피어오르는 가마솥의 물을 부으면 나는 발가벗고 오도카니 무릎을 감싸 안고 들어앉았다. 어머니는 바가지로 잔등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때를 불렸다. 물에 불려 진 때는 묵은 벽지마냥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찬 바람 한줄기가 잔등을 스치자 서늘한 기운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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