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지은이 : 이덕규
펴낸곳 : 문학동네
自序
스무 살 가을 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원짜리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올린다.
화성에서 이덕규
p. s 나는 농민시를 찾다가 ‘밥그릇 경전’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느 글에서 이 자서를 접했다. 이덕규 시인의 시집 두 권을 손에 넣었다. 시인은 태어나고 자란 경기 화성 정남 괘랑리에서 오리농법으로 유기농을 짓는 농부였다. 시인을 만난 것이 고맙고, 두 권의 시집이 나의 손에 있다는 것이 기쁘다. 이 自序는 시인이 ‘슬픔은 분노로, 눈물은 독(毒)’으로 가슴에 묻어 두었던 스무 살 대학생 시절, 방황 중 섬진강변 압록역 대합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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