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언 손
지은이 : 이세기
펴낸곳 : 창비
“한겨울 밤중 적막을 깨는 장독 터지는 소리를 정말 실감나게 묘사 했더라. 시인은 분명 그 소리를 들었을 거야.” 오래전에 시인 함민복은 찰랑거리는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감탄조로 되뇌었다. 나는 이번 시집을 펼치며 분명 이 구절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없었다. 품절되어 어렵게 중고샵을 통해 손에 넣은 시인의 첫 시집 「먹염바다」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시인의 시다. 5년 만에 펴낸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은 1·2부에 나뉘어 53시편과 해설로 문학평론가 박수연의 ‘고요한 비애, 반복의 심미화’가 실렸다. 첫 시집과 마찬가지로 황해를 시적 모태로 둔 시인은 바다와 섬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여전히 시선을 두고 있었다.
대청도, 백령도, 연평도, 소청도, 덕적도, 각흘도, 묵도, 장구도, 선갑도, 백아도, 굴업도, 울도. 시편들에 등장하는 황해의 섬들이다. 故 박영근 시인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던 오래 묵은 삶의 풍경이 시적 새로움을 획득하는 경탄’이라고, 정회성 시인은 ‘이 풍요로운 시대에 오래된 가난한 이야기가 어떻게 참신한 시적 새로움을 획득하는지 그 비밀스런 경지를 훔쳐보는 즐거움’이 있다고 시를 평가했다. 「먹염바다」 리뷰에서 얘기했듯 시인의 전력은 공장노동자다. ‘가좌동’, ‘장릉공단’의 공장에 시인은 한때 몸담았을 것이다. ‘베트남 오누이’, ‘무슬림 라카하’등 몇 편의 시에 이주노동자의 눈물이 어룽졌다. 시인은 2005년부터 ‘한국이주인권센터’와 ‘아시아이주문화공간’의 상담사로 활동하고 있다. 시인은 70만 이주노동자의 삶과 꿈을 그린 「이주, 그 먼 길」(2012년, 후마니타스)를 펴냈다.
한겨울 여명이 터오는 07:30. 주문도발 강화도 외포리행 삼보12호 첫배. 객실의 달아오른 전기판넬에 등을 지지며 목침을 베고 나는 시집을 펼쳤다. 올 들어 처음 눈답게 내린 눈이 띄엄띄엄 바다에 떨어진 섬들의 풍경을 청전 이상범의 설촌(雪村)처럼 잔설이 잎을 떨 군 겨울 수목을 하얗게 덮었다. 나는 한 달만의 뭍 나들이에 굴 한관을 준비했다. 시인 친구와 김장에 굴을 넣어야겠다는 아는 이의 부탁을 못 들어준 것이 마음에 걸려 반관씩 두 묶음이었다. 이 굴은 주문도의 굴 밭 ‘구렁텅’에서 옆집 형수가 겨울바다 바람에 곱은 ‘언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죄로 쫀 노동의 산물이었다. ‘굴을 쪼는 일’(96 ~ 97쪽)의 노동 강도는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 없다. 그 과정을 시인은 이렇게 읊었다.
굴을 쪼는 일은 / 추위를 / 따는 거라지
허리를 / 굽히는 것보다 / 펴는 것이 / 더 힘이 든
굴을 쪼는 일은 / 추위를 / 꼭꼭 쪼는 거라지
갯바위가 온통 / 허옇게 굴껍데기로 / 뒤덮일 때
비로소 추위는 / 떠나가는 거라지
생활은 / 추위 같은 것
살얼음 핀 / 언 갯바위에 / 수북한 굴구적마냥
겨울 한철을 보낸 / 쇳부리가 무른 / 굴방쇠를 보는 것마냥
굴을 쪼는 일은 / 갯굴헝 어둠을 닮은 / 생활을 쪼는 일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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