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공손한 손

대빈창 2015. 10. 13. 07:00

 

 

책이름 : 공손한 손

지은이 : 고영민

펴낸곳 : 창비

 

스쿠터·빨간 화이바 / 싸이프러스 눈길 / 경운기 짐칸 / 까마귀 쓸개 / 모시조개 패각 / 밥뚜껑 / 국수틀·소쿠리 / 생선가시 / 풋모과 / 수숫대 / 기러기 울음 / 벙어리 스님 / 양철지붕 / 널평상 / 돌무더기 / 항아리 / 징검다리 / 마른 저수지 / 뜸부기 / 새끼 고양이 / 늙은 은행나무 / 늙은 개 / 젖은 모래 / 개개비 둥지 / 여우비 / 워낭소리 / 친정집 뒤란 / 캄캄한 구들 / 부지깽이 / 그늘 냄새 / 매미소리 / 눅눅한 아궁이 / 쑥국새 / 풍경소리 / 군것질거리 / 돌배나무

 

시편들의 제재다. 4부에 나뉘어 모두 62편이 실렸고, 해설은 문학평론가 구모룡의 「향수와 비애」다. 제재가 말해주듯 시편들은 유년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주조를 이루었다. 시인은 열네살 때 고향 서산을 떠나 서울로 유학 왔다. 시인은 12남매의 막내로 아버지가 마흔여섯에 본 늦둥이였다. 대가족 농촌공동체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큰 시인은 도시생활이 힘들었다. 시인은 ‘환멸의 세계를 견뎌내는 희망의 단초’를 ‘유년기에 대한 집착’과 ‘공간에 대한 기억’에서 찾았다.

두 번째 시집에서도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따뜻한 추억을 불러내는 사라져가는 풍경을 노래했다. 민물에 담가놓은 모시조개가 토해놓은 「해감」(22쪽) 모래를 보면서 아버지의 임종을 떠올렸다. 모시조개는 바지락이다. 나의 작은 형은 눈썰미가 빠르다. 섬에 들어오자마자 하루 만에 할머니들한테 조개가 숨 쉬는 갯벌 눈을 알아채는 법을 전수(?) 받았다. 국거리로 일품인 가무락을 캐 오면 나는 선창에 나가 말통 다섯 개에 조금 물 때 파란 바닷물을 퍼왔다. 작은 형이 캐 온 가무락을 함지박에 쏟으면 나는 말통의 바닷물을 부어 해감을 시켰다.

「과수원」(76 ~ 77쪽)에서 어린 시인은 사과과수원에 농약을 치시는 부모를 도와 농약이 바닥에 가라앉지 못하게 하루 종일 약통을 저었다. 나는 단순노동의 지루함을 일찌감치 체득했다. 삼복더위 그늘하나 없는 논두렁의 뙤약볕 아래 어린 나는 수동식 분무기의 손잡이를 부지런히 밀고 당겼다. 농사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티가 나지 않았다. 조금 더 쉬고 싶은 욕심에 압력으로 뻑뻑한 손잡이를 있는 힘껏 밀었다. 사단이 났다. 호스의 약한 부분이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어느 볕 좋은 날, 낫으로 벼를 베던 아버지가 혀를 쯔쯔! 차셨다. 팔을 벌린 만큼 둥그렇게 벼포기가 없는 휑한 공간이 나타났다.

모내기가 끝나고 매일 새벽 골안개가 다랑구지에 밀려들었다. 어느날 불현 듯 그 많던 오리들이 눈에 뜨이지 않았다. 녀석들은 늦은 가을 기러기에 뒤이어 대빈창 들녘에 날아와 겨울을 났다. 못자리를 만들고 ,무논에 물을 가두고, 모내기하는 논에서 녀석들은 항상 농부들과 함께 했다. 인기척에 놀라 서툰 날개짓으로 날아오른 녀석들이 멋지게 논물에 미끄러져 내려앉았다. 「물목」(83쪽)의 전문이다.

 

봄날, 청둥오리들이 / 물 홑청을 펼쳐놓고 / 바느질을 하고 있다

잔잔히 펼쳐놓은 원단을 / 자맥질하여 / 일정한 땀수로 꼼꼼히 / 박음질을 하고 있다 / 겨우내 덮고 있던 너희들의 낡고 큰 이불

제법 큰 놈은 한번에 두 땀, 석 땀씩 / 꿰매고 있다

꼼꼼하여 / 바늘땀이 보이지 않는다 / 다만, 헐겁던 수면이 / 팽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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