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 18

고라니는 쓸개가 없다 - 5

위 이미지는 보름 전 저녁산책에서 만난 고라니이다. 곧게 뻗은 대빈창 해변 제방에 들어서 반환점 바위벼랑을 향해 걸었다. 고라니 한 마리가 나를 등진 채 제방과 산사면 사이 공터의 풀을 뜯으며 천천히 앞서 걸었다. 다행스럽게 귀가 어두운 녀석인지 눈치 채지 못했다. 바위벼랑 전망대를 오르는 나무계단이 보였다. 앞이 막히고, 그때서야 고라니는 뒤를 돌아보았다. 서향을 바라보는 해변의 일몰 한 시간 전 햇살은 강렬했다.녀석은 눈이 부신 지 잠깐 멈칫했다. 『고라니는 쓸개가 없다』 다섯 번째 이미지를 얻었다. 고라니는 예의 날렵한 뜀박질로 아까시 숲으로 사라졌다. 서해의 작은 외딴섬마다 고라니 천국이다. 섬 농부들은 작물의 어린 순을 탐하는 녀석들로 인해 골머리를 썩였다. 고라니들은 언제부터 섬에 자리를 잡았..

고라니는 쓸개가 없다 - 4

내가 사는 서해의 작은 외딴 섬 주문도에서 가장 흔하게 눈에 뜨이는 야생동물이 고라니입니다. 고라니는 우제목 사슴과로 몸집이 노루보다 약간 작습니다. 노루와 고라니의 다른 점은 노루의 수컷은 뿔이 있지만 고라니 수컷은 큰 송곳니가 입 밖으로 삐죽 나왔습니다. 고라니 울음은 뼛속까지 울리는 극한의 고통을 나타내는 데시벨입니다. 섬에서 처음 들은 단말마에,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덫이나 올가미에 걸려 죽어가는 고라니였습니다. 무지가 빚어 낸 착각이었습니다. 녀석의 울음은 자기 영역을 침범한 다른 고라니를 쫓아내려는 경고음, 암컷 고라니를 향한 구애 세레나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한 위협 소리라고 합니다. 산책을 나설 때마다 대여섯 마리가 눈에 띄는 고라니는 믿을 수 없게, IUCN(국제자연보전연맹)의 ..

고라니는 쓸개가 없다 - 3

내가 사는 서해의 작은 외딴 섬 주문도는 밤낮을 가리지않고 고라니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그때마다 두 귀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뼛속마저 울리는 극한의 고통스런 울음은 듣는 이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다. 녀석은 목을 파고드는 올가미나 발목을 조여드는 덫에 피를 흘리며 순한 눈동자에 가득 눈물을 머금었을 것이다. 나는 니빠로 철사를 끊거나 빠루로 덫의 아가리를 벌리는 공상에 빠져들었다.모르는 이의 근심과 걱정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환경운동하는 작가’ 최성각의 산문집 『산들바람 산들 분다』(오월의봄, 2021)를 읽고 나의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고라니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은 죽음을 앞둔 단말마의 비명이 아니었다. 암컷에게 알리는 번식기의 수컷 울음소리였다. 어째 순하디순한 눈망..

겨울 산책

5일 만에 아침 산책에 나섰습니다. 요즘 서해의 작은 외딴 섬 주문도의 일출시간은 7시 50분, 일몰 시간은 5시 40분입니다. 절기상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집니다. 해가 짧아지는 추운 계절이 돌아오면 산책을 실내운동으로 대신합니다. 주말이 돌아오면 해가 봉구지산을 넘는 늦은 시간에 산책을 나서게 됩니다.  기온이 다시 영하로 떨어졌습니다. 두건과 장갑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봉구산자락을 따라가는 산책길에 올라섰습니다. 옛길은 산자락을 일군 밭과 다랑구지 논의 경계를 지으며 해변으로 향합니다.밭가를 두른 폐그물 울타리에 갇힌 고라니가 나를 보고 당황스런 뜀박질로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전세계적 희귀종으로 전체 고라니의 90% 이상인 10만개체가 한반도에 살아갑니다. 산책을 나설 때마다 눈에 뜨이는 고라니가 ..

고라니, 길을 잃다.

고라니는 소목 사슴과에 속하고, 노루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몸체가 작습니다. 암수 모두 뿔이 없으나 수컷은 송곳니가 튀어나와 구분된다고 합니다. 녀석들은 뜀뛰기 선수로 사람 그림자만 보여도 쏜살같이 내달려 실제 수컷인지 암컷인지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고라니의 검은 눈망울은 금방 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슬프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녀석들의 담갈색 털은 억세기 그지없습니다. 고라니는 초식동물로 연한 나뭇잎과 새순을 탐합니다. 푸른잎이 귀한 겨울철은 풀·나무뿌리와 여린 나뭇가지로 연명합니다. 어느 해 눈이 많았던 겨울, 녀석들은 울타리로 둘러진 사철나무 잎을 뜯어 먹었습니다. 신경통·관절염에 고라니 뼈가 직통이라는 민간요법에 전해오는 속설로 녀석들은 줄곧 수난을 당했습니다.뜬금없이 물 빠진 갯벌 한 가운데 고라..

경자년庚子年 망종芒種의 텃밭

송홧가루 날리는 / 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 길다 / 꾀꼬리 울면 // 산지기 외딴 집 / 눈먼 처녀사 // 문설주에 귀 대이고 / 엿듣고 있다 박목월의 「윤사월」의 전문입니다. 2020년 경자년(庚子年)의 망종(芒種)은 윤사월 열나흘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나무는 소나무입니다. 윤사월이 시작되며 소나무가 날리는 송홧가루는 눈에 뜨이는 모든 사물을 노란색으로 물들였습니다. 봄비가 잦아, 고인 물웅덩이마다 기름띠처럼 송홧가루가 금빛 물살을 이루었습니다. 위 이미지는 망종의 이른 아침 텃밭 전경입니다. 자욱한 안개가 외딴섬의 봄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사흘 동안 햇빛 한 점 볼 수 없는 오리무중의 나날이었습니다.텃밭을 카메라에 담는 모습을 느리가 웅크려 앉은 채 올려다보았습니다. 느리는 세 살입니다. 녀..

텃밭을 부치다 2020.06.08

웃는 연습

책이름 : 웃는 연습지은이 : 박성우펴낸곳 : 창비 『거미』(창비, 2002) / 『가뜬한 잠』(창비, 2007) / 『자두나무 정류장』(창비, 2011) / 『웃는 연습』(창비, 2017)『박성우 시인의 창문 엽서』(창비, 2015) 농촌 공동체적 삶을 그리는데 탁월한 서정시인 박성우의 시집과 산문집을 한꺼번에 손에 넣었다. 오늘로 시인의 네 권 시집을 손에서 떼었다. 산문집은 좀 더 아껴두어야겠다. 누군가는 사회적 명예와 부를 움켜잡으려 애쓰는 교수직을 시인은 삼년 만에 스스로 그만 두었다. 그리고 자두나무 정류장과 이팝나무 우체통이 있는 외딴 강마을에서 농사일을 하며 시를 썼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순정한 마음의 시인을, 동료 시인 박준은 표사에서 “그를 그냥 시인이라고만 불러도 될까. ..

자두나무 정류장

책이름 : 자두나무 정류장지은이 : 박성우펴낸곳 : 창비 표제 『자두나무 정류장』에서 작고한 건축가 정기용 선생이 지은 화가이자 생태운동가 정상명의 춘천 ‘자두나무집’을 잠시 떠올렸다. 시인은 2006년부터 정읍시 산내면에서 컨테이너 생활을 하며 시와 농사를 지으며, 강의와 전통문화 관련 일을 해왔다. 자신의 고향이자 농경문화 전통이 살아있는 전북 정읍을 시적 공간으로 삼았다. 시인의 산골마을은 자두나무 정류장이 있다.시인의 세 번째 시집은 3부에 나뉘어 56편이 실렸다. 해설은 문학평론가 하상일의 「“별말 없이”도 따뜻하고 아름다운」이다. 투명하고 정갈한 언어로 산골 이웃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노래했다. 직접 농사짓고 이웃들과 알뜰살뜰 몸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상을 아름다운 서..

귀토야생기(歸兎野生記) - 14

왼쪽 이미지가 토진이가 사는 터에 이르는 제방 진입로입니다. 느리 선착장에서 강화도를 하루 두 번 오가는 카페리에서 내립니다. 서도면사무소, 보건지소, 파출소가 자리 잡은 느리 마을입니다. 바다를 보며 일렬로 늘어 선 선창 집들을 지나 하얀쪽배 펜션을 오른편에 끼고 100여m 걷다 다시 우회전하면 야트막한 고개가 나타납니다. 고개를 내려서면 다랑구지 들녘입니다. 들녘 가운데 농로를 타고 걸어 들어가면 멀리 해송 숲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른쪽은 다랑구지를 바라보는 대빈창 마을집들이 일렬로 늘어섰고, 왼쪽은 낮은 구릉이 바다를 가렸습니다. 만조시 고개마루에 올라서면 서해의 수평선을 볼 수 있습니다. 식재 된 해당화 군락지를 지나면 화장실, 수돗가, 쓰레기장이 설치된 대빈창 해변 야영장입니다. 폭이 좁고 긴 ..

고라니는 쓸개가 없다 - 2

- 어떤 처지에 있는지 모르는 고라니의 멍청한 짓은 쓸개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우스개로 들었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말, 노루, 고라니 등 풀만 먹는 초식동물은 담낭(膽囊)이 없습니다. - 2012년 7월 초에 올린 글의 마지막입니다. 엊그제가 입동이었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 서둘러 저녁산책에 나섰습니다. 이미지는 다랑구지 들녘을 지나 대빈창 해변의 초입입니다. 해안을 따라 가늘고 기다랗게 방풍림이 조성되었습니다. 숲 바닥은 조금만 파도 모래가 나옵니다. 오랜 세월 바닷바람을 타고 모래가 사구를 형성했습니다. 35여 년 전 가난했던 시절. 한 뼘의 논이라도 늘릴 심산으로 제방을 쌓고, 해송을 심어 바람을 막았습니다.숲에서 새끼 고라니가 해변 가는 길 위로 먼저 튀어 나왔습니다. 녀석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