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408

오솔길에서 옛 기억을 더듬다

제가 하루에 네다섯번 오고가는 오솔길입니다. 4월 하순입니다. 서해의 작은 섬 주문도의 봄은 더디기만 합니다. 꽃피는 시기가 강화도가 서울보다 5일 늦고, 주문도가 강화도보다 5일 늦다고 어르신네들은 말씀들 하십니다. 이제 개나리 꽃이 만개하면서 여린 새순이 고개를 내밉니다. 백목련도 덩달아 우람한 꽃송이들을 하늘을 향해 벌립니다. 섬 날씨가 차다는 것을 반증하는 에피소드를 한가지 소개해 드립니다. 새내기 직원이 처음 겨울을 나면서 4월말에 옛 친구들과 인천 부평역 지하상가에서 약속을 잡았습니다. 본도인 강화도행 첫배는 아침 7시입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새내기가 군고구마 장사가 걸치는 두터운 털점퍼를 걸치고 약속장소에 나가자 친구들이 모두 파안대소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는 알래스..

생강나무에는 생강이 없다

"어머니, 카메라 좀 갔다 주세요""이거""아니, 그건 연필깍이고, 장롱 밑에서 두번째 서랍에 까맣고 네모난 거요""이거구나. 뭐 찍을거 있냐""생강나무 꽃이 예뻐요. 왜 산에 가면 노란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잖아요""그게 생강나무야. 동백나무가 아니고""동백나무라고 그러기도 해요"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을 빨리 했습니다. 아침산행에서 한구비를 돌아서는 산비탈에 어느새 생강나무의 꽃이 만개 했습니다. 서도에서 팔경을 선정한다면 저는 지금 시절의 여기 생강나무 군락지를 꼽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봄의 전령으로 진달래나 개나리를 들먹입니다. 하지만 찬바람이 가시지않은 마른 숲에 가장 먼저 봄 소식을 알리는 나무가 생강나무입니다. 다른 나무들이 아직 새순을 꼭 아문 채 추위에 떨고 있을때 생강나무는 부지런하게 망울망..

안개가 섬을 깨운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밤새 안개가 점령군처럼 섬에 주둔했습니다. 얼마나 심한지 「물방울의 화가」 김창열의 그림처럼 방충망은 맺힌 물방울로 가득했습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등장하는 무진의 특산물 안개와 요절시인 기형도의 샛강의 자욱한 안개 못지않게 주문도의 안개는 주민들마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안개는 주문도에 봄이 온 것을 알리는 전령입니다. 해토가 되면서 대지가 뱉어낸 물기 입니다. 날이 차거나 바람이 나야 안개는 물러 납니다. 정분난 봄처녀와 달리 날씨는 바람 한점 없이 고요하고 푸근합니다. 봄햇살을 만끽하기는 커녕 안개가 온통 섬을 점령했습니다. 요즘 기상나팔 소리는 트랙터와 경운기 엔진음 입니다. 축축한 안개가 휘감은 대기를 뚫고 들려오는 기계음은 날카로운 금속성이기보다 묵지근한..

토건국가의 녹색성장

한국 사회는 절대적 토건국가입니다. 전체 국민 1인당 GDP의 20%를 차지하여, 선진국의 2배에 달하는 비중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흔히 박정희 독재정권 시대를 경제적으로 규정하는 용어로 '개발독재' 시대라고 합니다. 이 독소는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각인되어 사회적 암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 개발주의는 '무조건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무분별한 개발을 절대선'으로 여깁니다. 개발국가란 '국가가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개발의 주체로서, 그것도 지역의 자연과 문화를 더 많은 성장의 도구로 여기는 파괴적 개발의 주체로 구실하는 국가' 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개발국가 중에서도 가장 타락한 토건국가입니다. '토건업과 정치권이 유착하여 세금을 탕진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국가'로서 국토파괴는 그 맹목성과 폭력성, 반민..

대보름을 스케치하다

주문도의 큰 마을인 진말에서 연례행사인 대보름맞이 척사대회가 열렸습니다. 저는 찬조금을 들고 윷놀이가 열리는 마을회관으로 향했습니다. 떠들석한 흥청거림은 고사하고 쓸쓸하다 못해 허허롭기까지 하였습니다. 노인회장님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기운이 없어 보입니다. 병막걸리와 종이컵, 안주는 돼지고기 수육입니다. 행사의 주최자인 마을 청·장년회 회장님과 총무님은 이른 해장술로 벌써 얼굴이 화로를 뒤집어 쓴 것처럼 활활 타올랐습니다. 물에 적신 가마떼기 대신 길게 늘인 보온덮개가 윷판입니다. 남정네보다 아줌마들이 더욱 눈에 뜨입니다. 동네 유일의 구멍가게인 '신성상회'의 간판이 햇빛에 바랜 것처럼 농촌공동체가 자랑하던 마을잔치의 왁자지껄함이 사라졌습니다. 애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이 사라진 이후의, 오늘날 이 땅의 ..

바다, 바닥을 드러내다

2월 19일 토요일 우수, 음력 정월 열이레. 저조(11:45)-53. 2월 20일 일요일 음력 정월 열여드레, 저조(12:27) -58. 저는 지금 물때달력을 보고 있습니다. 토요일은 8물, 일요일은 9물 입니다. 위 사진은 주문도 선창에서 바라 본 석모도 앞바다 정경입니다. 물이 가장 많이 빠진 시간대입니다. 달력의 물때 시간은 인천항 기준이라 여기 주문도 시간으로는 대략 30분경 늦추어 계산하면 됩니다. 그러니깐 이 사진은 토요일 12시경 찍은 사진입니다. 물이 들고나는 수위도 여름과 겨울이 다릅니다. 여름에는 밤물이 많이 들고나고, 겨울에는 낮물이 많이 들고 납니다. 雨水인 19일 토요일은 1년중 낮에 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날입니다. 저도 감(물이 가장 많이 썬 시점에서 물이 들기까지 잔잔한 시..

섬의 시간은 고여 있다

지금 시간은 정오를 막 넘어서고 있습니다. 겨울답지 않게 방안은 환한 빛으로 가득 합니다. 방바닥의 터럭 한올도 금방 눈에 뜁니다. 제 방은 이중창문인데도 밖의 환한 빛 알갱이들이 축제처럼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찾을 수 없는 빛의 향연입니다. 이중 창문을 열어 젖힙니다. 유리창에 고사리 문양의 성에가 가득합니다. 밖의 기온이 많이 내려 갔습니다. 안팎의 기온차로 유리창에 결빙현상이 나타난 것 입니다. 밖의 창을 열어 젖힙니다. 섬은 눈나라가 되었습니다. 한자가 넘게 쌓인 눈이 쏟아지는 햇빛을 난반사시킵니다. 아! 그래서 이렇게 환한 것이구나! 일주일 전 작은 섬 주문도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습니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바람 한점없이 곱게 쌓인 눈은 20cm가 넘..

얼음 나다 또는 뜨다

'큰일났네. 얼음이 났네' 또는 '어쩐다냐. 얼음이 떴네'라는 우려와 근심어린 어르신네들의 목소리를 들은 지가 보름이 되었습니다. 위 사진을 보고 누가 바다 정경을 찍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분명 제가 살고 있는 주문도 앞바다입니다. 마주 보이는 섬이 아차도 입니다. 바다 가운데 하체는 노란색, 상체는 검은 색인 둥근 기둥은 작은 등대입니다. 불빛으로 현재의 위치를 배에게 알리는 흔히 알고있는 등대가 아닙니다. 얕은 바다인 서해에서 물속에 숨어있는 여의 위치를 알려주는 등대입니다. 강화도와 서도의 섬들 사이를 오가던 여객선은 항상 아차도앞 바다에 정박합니다. 정기 여객선의 이름은 '삼보 12호'입니다. 그런데 배가 보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얼음이 무서워 도망을 갔습니다. 승객 400명과 ..

은행나무에는 거시기가 달렸다

위 사진의 나무가 천연기념물 제304호인 '볼음도 은행나무'입니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는 모두 21그루입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나무인 소나무가 25그루로 제일 많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번은 볼음도에 건너 갑니다. 그러니깐 주일에 한번은 꼭 이 나무를 대면하니, 나의 삶에서 가장 친근한 나무이기도 합니다. 잎이 울창한 것으로 보아 이 사진은 여름에 찍은 것 같습니다. 뒤편 왼쪽의 모로누운 나무는 새끼나무가 아니라 소사나무입니다. 거대하고 울창한 은행나무 그늘아래 용케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진의 오른편에 10만평 넓이의 너른 볼음저수지가 펼쳐집니다. 볼음도 은행나무가 지금처럼 무성하고 우람해진 원인은 바로 이 저수지에 있습니다. 예전에는 바닷가에 자리잡아 짠기에 시달리던 나무는 영양부족으로..

2011.1.1 산행

이른 아침을 먹고, 마루로 올라서는 댓돌에 엉덩이를 걸치고 낡은 등산화의 끈을 조입니다. 산행을 눈치 챈 어머니가 한마디 하십니다. '대빈창으로 가지 그러냐.' 근래 내린 눈으로 산길이 미끄러울 것이라는 어머니의 염려스런 걱정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새해 첫 해돋이를 바닷가에서 맞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동해라면 모를까요. 서해에서는 오히려 한 해의 지는 해를 작별하는 것이 어울리겠지요. 그리고 저의 산행은 근 일주일을 머뭇거렸습니다. 연말의 계속되는 술자리와 퍼붓는 눈발로 산에 들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바다로 향하는 길을 버리고, 산길로 들어서면서 저는 서산대사의 선시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눈길을 처음 갈 때는 발자국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는. 하지만 산길에는 수많은 발자국이 어지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