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408

끝섬 똥바위 전설

“엄마. 비 와!” 눈을 비비며 엄마에게 날씨부터 물었습니다. 국민학교 시절 소풍가는 날이나, 운동회 날 아침이면 입에서 맨 먼저 나오던 말이었습니다. 설레임에 잠을 못 이루고 이리저리 뒤척이다 가까스로 잠들어 늦잠을 자고 일어나 마루로 나왔습니다. 하늘은 어김없이 빗방울을 떨구거나 잔뜩 흐려 있었습니다. 찡그린 낯 색을 무겁게 드리웠던 하늘도 행사를 시작하면 이때다 싶게 빗방울이 굵어졌습니다. 어른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학교 질 때 용이 삽날에 찍혀 죽었대. 그래서 용이 노해서 학교에서 큰일을 치르려면 비를 내린다는 구나.” 이 땅의 흔한 상룡(傷龍), 절맥(節脈)에 얽힌 전설(傳說)입니다. 이 전설은 중학에 들어가 다시 만납니다. 국어 교재에 실린 김동리의 단편소설 ‘황토기’입니다. 작가의 고..

가시덤불 속 찔레 열매

산비탈 가시덤불 속에 찔레 열매가 빨갛게 익어 있다 잡풀 우거진 가시덤불 속에 맺혀 있어서일까? 빛깔은 더 붉고 핏방울 돋듯 선명해 보인다 겨울 아침, 허공의 가지 끝에 매달린 까치밥처럼 눈에 선연해 눈이라도 내리면, 그 빛깔은 더욱 고혹적일 것이다 날카로운 가시들이 담장의 철조망처럼 얽혀 있는 찔레 덤불 속 손가락 하나 파고들 틈이 없을 것 같은 가시들 속에서 추위에 젖은 손들이 얹히는 대합실의 무쇠난로처럼 익고 있는 것은 아마, 날개를 가진 새들을 위한 단장일 터 마치磨齒의 입이 아닌, 부드러운 혀의 부리를 가진 새들을 기다리는 화장일 터 공중을 나는, 그 새들의 눈에 가장 잘 띄일 수 있도록 열매의 채색彩色을 운영해왔을 열매 영실營實이라는 이름의 열매 새의 날개가 유목의 천막인 열매 새의 깃털 속이..

아차도에 쌍무지개가 뜨다

어린 시절,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낮잠을 자다 혼자 깨어나 허둥거리며 가방을 챙겨 등굣길에 나섰는데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동무들이 보이지 않고, 그때서야 해가 기울어가는 때임을 알아차린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올 가을은 추적추적 비가 잦습니다. 그날 볼음도 일을 마치고 일찌감치 선창으로 나왔습니다. 외포리에서 이제 막 배가 뜬 시간이었습니다. 한시간 여 시간이 남았습니다. 줄금줄금 빗줄기가 차츰 굵어지고 있었습니다. 매표소안 의자에 길게 누워 읽던 책을 펼쳤습니다. 깜박 잠이 들었나 봅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멀리 석모도 보문사 앞바다에 여객선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먹구름이 급하게 가장자리로 밀려나면서 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무지개가 한 발을..

한국형 바나나를 아시나요

촬영 일자가 왼편 사진은 5월 18일이고, 오른편 사진은 10월 4일입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분들은 이미지의 나무를 금방 아실 것입니다. 으름입니다. 저도 으름 꽃을 처음 접합니다. 엄지손톱만한 보라색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나 신비롭습니다. 으름 꽃을 찍으며 내심 저는 가을에 열매를 맛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입안에 침이 고였습니다. 꽃을 피운 으름 덩굴은 제가 마을로 향하는 오솔길 옆 자두나무와 어울린 덩굴이었습니다. 하지만 열매를 볼 수 없었습니다. 휘몰아친 태풍 볼레반 때문으로 짐작할 뿐입니다. 저는 봉구산 숲속으로 들어섰습니다. 숲속은 으름덩굴 천지입니다. 어르신네들이 산너머 마을을 오가실 때 이용하던 봉구산자락 산허리에 걸쳐진 옛길의 나무들을 으름덩굴이 덮씌웠습니다. 산길은 으름덩굴 터널이었습..

나비와 벌 그리고 꽃의 삼중주

남방씨-알붐나비 : 학명 폴리고니아(Polygonia)는 다각형이란 뜻으로 나비의 앞뒤 날개의 선두리에 깊은 굴곡이 패여 각도가 선명하기 때문에 붙여졌습니다. 이 나비는 일 년에 두 번 발생하는데 가을형은 성충 나비 상태로 양지바른 곳에 깔린 낙엽 밑이나 바위아래 몸을 눕히고 겨울잠을 잡니다. 봄에 깨어난 나비들이 짝짓기로 생겨난 것이 여름형 나비들입니다. 뒤영벌 : 우리나라 꿀벌아과는 광채꽃벌, 어리호박벌, 뒤영벌, 꿀벌 등 4족(族) 32종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중 몸이 몹시 굵고 뚱뚱하며 털이 많은 뒤영벌족이 25종으로 가장 많습니다. 농작물의 약 80%가 꿀벌에 의해 수분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꿀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습니다. ‘꿀벌이 모두 사라지면 인류는 4년 뒤 멸망..

야윈 한가위 보름달

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에 나섰습니다. 대빈창 해변 솔밭에 야영 텐트가 대 여섯동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향을 찾았다가 옛 추억이 그리워 싸늘한 날씨에도 바깥 잠을 청하나 봅니다.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추레한 몰골을 한 진분홍의 저녁 노을위에 부피감이 뚜렷한 먹장구름이 하늘의 성채처럼 걸렸습니다. 봉구산자락으로 접어듭니다. 날이 흐려서인지 하늘에 달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은 낮과 밤의 경계입니다. 벌판의 벼들이 이삭이 무거워 한껏 고개를 숙였습니다. 말그대로 황금빛 들녘입니다. 내일모레 농부들은 벼베기를 할 날을 손꼽을 것입니다. 15호 태풍 볼레반에 휘둘린 고추 포기에 새잎이 돋았습니다. 고구마는 태풍이 지나간 후 넝쿨을 바짝 땅에 대고 눈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섬 주민들에게 가장..

곤줄박이가 땅콩을 훔쳐가다

올 추분은 주말이었습니다. 해가 많이 짧아졌습니다. 여명이 터오기 시작했습니다. 창고 구석에 처박힌 헌 등산화를 꿰찼습니다. 목장갑을 끼고 텃밭에 내려섰습니다. 이슬이 펑하게 내렸습니다. 땅콩 줄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뽑아 올렸습니다. 땅콩 꼬투리가 줄줄이 딸려 올라 옵니다. 땅콩은 캐는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너무 늦으면 꼬투리 줄기가 끊어져 수확이 번거롭습니다. 땅속에 숨은 땅콩을 호미로 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대로 땅콩 캐는 시기를 잘 맞춘 것 같습니다. 한 시간여 만에 두 이랑의 땅콩을 뽑아 두둑에 가지런히 줄을 맞추었습니다. 어머니의 손에 깔방석이 들렸습니다. 어머니가 뿌리에 엉킨 흙과 꼬투리를 털어내고 땁니다. 저는 땅콩 꼬투리를 집 앞 마당에 편 그물에 넙니다. 올 땅콩 농사는 풍년..

이제 섬에 흑진주는 없다

자주꽃 핀 건/자주 감자/파보나마나/자주 감자/하얀꽃 핀 건/하얀 감자/파보나마나/하얀 감자 독립운동가 권태응의 ‘감자꽃’ 노랫말입니다. 오래전에 나는 충주 탄금대 공원 한편에 서있던 시비를 보았습니다. 일제 암흑기에 민족의식을 고양시킨 노래지만, 가사는 식물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모든 식물은 생장하면서 자기색을 현현합니다. 열매색과 잎색은 상응합니다. 감자는 꽃색으로 우리가 식용하는 덩이줄기의 색을 알 수 있습니다. 강화도가 자랑하는 속노랑고구마는 잎색으로 일반 고구마와 구별됩니다. 속노랑고구마의 잎사귀 반 정도는 자주색입니다. 밤고구마는 녹색잎 뿐입니다. 위 이미지의 벼 잎색이 검게 두드러져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콤바인으로 베는 벼는 흑미로 품종 이름은 흑진주입니다. 사진은 작년에 ..

소금쟁이는 어디로 갔을까

주문도에 삶터를 내려놓은 지 7년이 넘어섰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아침, 저녁으로 짧은 순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순례는 폭우나 폭설 등 천재지변을 제외하고, 두 다리가 움직이는 한 지속될 것입니다. 저는 여섯 시에 일어납니다. 이른 아침을 먹고 바로 봉구산 숲속으로 들어섭니다. 산정에서 두 팔을 벌려 심호흡을 하며 서도 군도(群島)를 부감합니다. 사시사철 바뀌는 물때와 갯벌, 점점이 떠있는 무인도들, 섬들 사이 바다에 떠있는 어선들. 계절이 깊어 가면서 색이 변하는 들녘에 눈길을 주고 산을 내려옵니다. 해가 늦은 겨울에는 일곱 시에 산에 듭니다. 저녁 여섯 시. 밥을 먹자마자 등산화 끈을 조입니다. 저녁 순례입니다. 들녘을 가로질러 대빈창 해변을 향하다가 봉구산자락으로 접어듭니다. 봉구산의 옆구리를 ..

천지와 백록담은 휴화산이다

벌써 열흘이 되었습니다. 한반도 전체가 폭염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한 초입으로 기억됩니다. 서해 낙도에 흔치않은 공연단이 찾아 왔습니다. 11시가 넘어서자 중천에 솟은 태양은 표창 같은 햇살을 뿌려대기 시작했습니다. 대지는 뜨겁게 달아올라 숨 막히는 열기를 뿜었습니다. 마을 앰프방송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칠순을 넘기신 어르신들이 하나둘 언덕 위 교회를 향해 힘든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공연이 시작 되면서 얼추 예배당에 반정도나마 좌석이 들어찼습니다. 찜통더위에 이만한 피서지가 없습니다. 실내는 성능 좋은 에어컨이 씽씽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반갑습네다” 짙은 화장의 예술단 단장이라는 중년 여성의 북녘 사투리로 공연의 막이 올랐습니다. 섬을 찾은 공연단은 ‘평양 백두·한라 예술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