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408

저 스티로폼 박스가 궁금하다.

기온이 내려가며 갯벌에 죽쎄기가 보입니다. 죽쎄기는 갯벌에 앉은 얼음장을 말하는 섬 방언입니다. 물이 들면서 백사장을 어루만지는 물살에 살얼음이 돋고, 물이 빠지면 갯벌에 하얀 성에가 내려앉습니다. 날이 차지면 죽쎄기가 덩치를 키웁니다. 대빈창 해변 물놀이 터의 안전선이 찬바람과 얼음 같은 바닷물에 출렁거립니다. 시간이 갈수록 물드는 높이가 낮아집니다. 년중 유두사리와 백중사리에 물이 많이 밀었다가 차츰 줄어듭니다. 두달 전 해변 제방 언저리에 밀려 온 스티로폼 박스입니다. 사각형 박스 뚜껑에 네모 난 구멍을 뚫었습니다. 동여 맨 노끈은 어깨에 걸쳤을 나뭇가지에 매였습니다. 도대체 저 스티로폼 박스의 용도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올 겨울은 굴 흉년입니다. 기온 탓인지 굴이 제대로 여물지 못했습니다. 굴 ..

외딴 섬 작은 교회 성탄절

성탄절 전야. 시나브로 어둠이 장막을 내렸습니다. 서해 외딴 섬의 작은 교회는 산허리에서 느리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산의 경사를 밀어 앉은 교회는 높은 축대위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파르테논 신전처럼. 성탄 전야의 저녁을 함께 하자고 장로님이 말을 건넸습니다. 연례행사는 올해도 어김없이 돼지를 잡아 순대국을 끓였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한 끼를 나눕니다. 옆집 형수가 어머니를 위해 주발에 김이 설설 나는 순대국을 가득 담아왔습니다. 어머니와 단출한 성탄 전야 저녁을 했습니다. 여느 해와 다름없이 소박한 트리가 교회 마당을 장식했습니다. 제가 섬에 정착한 이후로 변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깜박이 전구가 2층 종루에서 사택, 식당 건물로 길게 늘..

가을의 끝, 비우다

절기는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을 지나, 겨울의 길목이라는 입동을 향하고 있습니다. 해가 많이 짧아졌습니다. 저의 산책시간은 아침저녁 6시입니다. 아침은 푸른 대기가 점차 엷어지면서 먼동이 터오고, 저녁은 시나브로 땅거미가 대기에 삼투압처럼 스며듭니다. 다랑구지 논들은 바리깡이 머리칼을 밀 듯 콤바인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밤중까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일을 합니다. 날이 차가워졌습니다. 이제 들녘은 텅 비었습니다. 모내고 두 달여동안 비만 퍼부어 농민들의 가슴을 까맣게 태우더니, 다행히 비 한 방울 줄금거리지 않은 가을볕이 꾸준해 평년작을 이루었습니다. 계절을 잊지 않은 기러기 떼가 논바닥을 덮었습니다. 녀석들은 기특하고 대견합니다. 추수가 시작될 무렵 찾아 온 진객이지만 볏대에 달린 이삭에 눈길도 주지 않습..

나의 쉼플레가데스

소설가·번역가·신화학자 이윤기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8년이 되었습니다. 선생이 독자들에게 마지막 선물한 신화 이야기는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 입니다. 금양모피(金羊毛皮) - 황금 빛 양의 털가죽을 찾아 떠난 이아손 일행의 모험을 그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5』가 유작이었습니다. 원정대가 금양모피가 있는 콜키스에 닿기 위해서는 ‘적대의 바다’ 흑해를 건너야 합니다. 가장 큰 난관인 ‘쉼플레가데스’를 뚫고 지나가야만 합니다. 여기서 쉼플레가데스는 ‘충돌하는 두 개의 바위섬’을 말합니다. 한 인생의 항해에서 누구나 파랑을 만나고, 암초에 부딪히는 위기를 몇 번 마주쳐야 합니다. 나의 흑해와 쉼플레가데스는 무엇이었을까. 10년 전 홀어머니를 모시고 서해의 작은 외딴 섬 주문도에 삶터를 꾸렸습..

아버지, 자연으로 돌아가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겨우 참았을 것이다 처자식이 딸린 몸이라 늘 과묵했을 것이다 초지일관 소시민처럼 무력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유권자답게 어리석었을 것이다 철저히 비겁하거나 비굴했을 것이다 설마 좀 부끄럽기는 했을 것이다 행여 자식들한테 들킬세라 체면은 늘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애는 끊어지고 심장은 자칫 터져버릴 뻔 했을 것이다 그럴수록 생활은 더 위축되고 경직됐을 것이다 가끔 화난 얼굴로 이렇게 한마디 툭 던지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 집구석 꼬락서니 하고는 아내나 자식들은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혼자 주절거리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 이제 처자식 때문에 조아리고 굽실거리는 게 버릇이 되었는데 - 이 세상의 그놈들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 강한 놈 앞에 서면 어김없이 처자식의..

나팔꽃을 세다

“내가 피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나팔꽃이 피어 있을 뿐인데, 나는 마치 내가 피어나는 것처럼 분발했다.” ‘여기에 사는 즐거움’의 한 구절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처마 아래에 놓인 화분의 나팔꽃을 세는 것이 야마오 산세이의 즐거움 이었습니다. 1977년 그의 온 가족은 도쿄에서 남쪽 작은 섬인 야쿠 섬으로 이사를 합니다. 야쿠 섬의 크기는 제주도의 5분의 1입니다. 25년 동안 그는 소박한 섬 생활을 하다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다행히 강원도 산중에서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최성현을 통해 야마오 산세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지역주의(bio-regionalism)는 자연을 물건으로 간주하며 착취해 온 삶을 버리고,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것을 깨닫고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모든 생명, 풀..

생태 섬을 향한 한 걸음

몽돌 해변과 기암절경이 어우러지고 선사 유적지가 잘 보존되어 있는 통영에서 직항으로 18㎞로 10분이면 닿는 주민 80여명의 작은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의 연간 난방비는 제로입니다. 겨울이면 보조를 받던 석유가 필요 없어져 집집마다 석유통을 모두 반납했습니다. 그것은 화석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친환경 생태 섬으로 거듭 난 데는 태양광 발전소를 설치하여 전 세대가 태양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에코 아일랜드는 이제 사람들이 떠나가는 섬에서 생태 보존의 모범 사례로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연대도입니다. 강화도에서 카페리호를 타고 주문도에 닿으려면 1시간30분이 소요됩니다. 배를 타면 바다 위 거대한 송전탑들이 눈에 거슬립니다. 서도(西島) 군도 4개의 유인도에 전기가 들어옵니다. ..

DMZ은 생명의 땅이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 ~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 ~ 올해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입니다. 위 노래가사는 이 땅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가곡 ‘비목(碑木)’의 시작부입니다. 여기서 비목은 나무비석을 말합니다. 한국전쟁 때 강원 화천에서 숨진 이름 모를 4만여명의 국군과 중국군 돌무덤 앞에 놓인 나무비석이 비목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 허리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 상처를 꿰맨 실밥이 휴전선입니다. 휴전선을 따라 폭 4㎞, 길이 249㎞의 완충지대가 '비무장지대(DMZ)'입니다. 한반도 허리 155마일을 가로지른 ‘삼팔선’에 인접한 김포평야에서 저는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대남방송 소리를 들으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마쳤습..

꿩의 이소를 안개가 덮어주다.

아주 오래된 얘기입니다. 아차도에 황새 한 쌍이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런데 동쪽바다에 매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또 서쪽에 독수리가 터를 잡았습니다. 황새는 독수리를 찾아가 동쪽의 매를 쫓아 달라고 부탁 하였습니다. 그러자 독수리가 “그러면 너는 무엇을 나에게 줄 것이냐”고 되물었습니다. 황새는 생선 잡는 재주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독수리는 동쪽 산에서 날마다 매를 지켰고, 황새는 날마다 생선을 잡아 널어놓았습니다. 황새가 살던 곳이 ‘황새지’이고, 매가 살던 곳은 ‘매여’이고, 독수리가 살던 곳은 수리봉과 쇠수리 입니다. 황새가 생선을 잡아 널어놓던 곳은 너배(널배)이고, 매가 황새를 따라 다니지 못하게 수리가 지키던 곳은 딸매입니다. 지금도 두 매녀 때문에 꿩이 들어오질 못해 아차도에 꿩이 없다..

세물에는 꾸서라도 눈을 뜬다

위 이미지의 조개는 가무락입니다. 가무락이 바닷물에 담겨 거품을 밀어 올리고 있습니다. 가무락의 표준어는 모시조개로 대합과에 속하는 이매패류입니다. 조개껍데기가 검다고 해서 가무락이라고 흔히 부릅니다. 가무락은 맑은 국이 일품입니다. 아무 양념 없이 대파와 청양고추 한두 개 썰어 넣으면 칼칼하고 시원한 국물이 밥 한 그릇 뚝딱입니다. 주문도에 삶터를 내리면서 자주 밥상에 오르는 국거리입니다. “오늘이 세물야, 가무락이 꾸서라도 눈을 뜬데지.” 아랫집 할머니 손에 조개 담을 망과 호미가 들렸습니다. 여기서 세물은 물때를 말합니다. 지구의 원심력과 달과 태양의 움직임으로 바닷물은 계속 움직입니다. 달의 주기에 맞추어 바닷물도 보름을 주기로 변합니다. 지구는 24시간에 한번 자전하는데, 달은 지구를 24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