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11

개를 위한 노래

책이름 : 개를 위한 노래 지은이 : 메리 올리버 옮긴이 : 민승남 펴낸곳 : 미디어창비 당신은 / 살아가면서 / 이보다 더 경이로운 걸 / 본 적이 있어? // 해가 / 모든 저녁에 / 느긋하고 편안하게 / 지평선을 향해 떠가서 // 구름이나 산속으로, / 주름진 바다로 / 사라지는 것- / 그리고 아침이면 // 다시금 / 세상 저편에서 / 어둠으로부터 미끄러져 나오는 것. / 한 송이 붉은 꽃처럼 메리 올리버(Mary Oliver, 1935-2019)의 「기러기」의 부분이다. 시인의 대표시를 나는 문학평론집을 뒤적이다 두세 번 만났다. 시인은 여든세 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스물여섯 권의 시집과 일곱 권의 산문집을 남겼다. 1984년 퓰리처상을, 1992년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단연코..

대빈창 억새

위 이미지는 24절기 가운데 한로와 입동 사이에 드는 열여덟 번째 절기 상강霜降을 며칠 남긴 대빈창 억새이다. 상강은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고 밤에는 기온이 매우 낮아, 수증기가 지표에서 엉겨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의 계절이다. 아침 산책에서 물 빠진 갯벌에서 쉬고 있는 고단한 기러기들의 애먼 날갯짓이 미안해 발길을 돌려 반대방향 제방을 탔다. 제방 끝은 마을공동어장 구라탕으로 내려서는 길목이었다. 바람에 쓸려 온 모래가 쌓여 작은 둔덕을 이루었고 억새가 뿌리를 내렸다. 제방 끝은 월파벽 공사를 막 끝내 토목 자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포클레인이 빈 공터를 차지했고, 거푸집이 차곡차곡 쌓였다. 일을 끝내고 뭍으로 나간 인부들이 고마웠다. 그들은 억새 한 포기 건드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억새와 갈대를..

임인년壬寅年 기러기

임인년壬寅年 벼농사 수확이 시작되었고 기러기가 날아왔다. 스무날 전 몇 필지의 중생종 진상을 수확한 논에 내려앉은 한 가족으로 보이는 여섯 마리가 첫 손님이었다. 열흘 전 본격적인 주문도 대빈창 들녘의 만생종 삼광・추청 벼베기가 시작되었다. 놈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새카맣게 다랑구지 들녘에 몰려들었다. 나는 기러기들이 대견했다. 녀석들은 논에 서있는 알곡에 절대 입을 대지 않았다. 콤바인이 수확하면서 논바닥에 흘린 벼알만 주워 먹었다. 이미지는 한 주일전 점심 산책으로 봉구산 자락을 벗어나 대빈창 해변으로 향하는 옛길에 올라섰을 때 인기척에 놀라 하늘로 떠오른 기러기떼였다. 올 해는 여는 해보다 많은 기러기가 날아왔다. 날이 갈수록 놈들의 수가 무섭게 불어났다. 벼를 벤 논에 내려앉은 기러기가 빈틈없..

청양고추를 삼킨 기러기

겨울 햇살이 봉구산을 넘어 온 늦은 아침, 산자락 옛길을 따라 아침 산책에 나섰다. 이미지는 고추밭에서 휴식을 취하던 기러기 떼가 인기척에 놀라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옛길은 산자락을 벗어나 논길로 이어지고, 대빈창 해변 제방에 연결되었다. 길을 따라가면 기러기 똥이 여기저기 널렸다. 두 잠을 잔 누에 같기도 하고, 난로 땔감 펠릿처럼 생겼다.주문도의 겨울 전령은 기러기였다. 녀석들은 콤바인이 들녘에 나타나는 때를 용케 알아챘다. 벼를 벤 논바닥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는 흘린 낱알을 알뜰하게 주워 먹었다. 몇 년 전부터 겨울 주문도 들녘에 기러기가 많이 날아왔다. 교동대교와 석모대교가 놓였다. 두 섬이 뭍과 연결되며서 녀석들이 부쩍 눈에 띄었다. 아이들이 공룡알이나 마시멜로로 부르는 ‘볏짚 ..

겨울 산책

5일 만에 아침 산책에 나섰습니다. 요즘 서해의 작은 외딴 섬 주문도의 일출시간은 7시 50분, 일몰 시간은 5시 40분입니다. 절기상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집니다. 해가 짧아지는 추운 계절이 돌아오면 산책을 실내운동으로 대신합니다. 주말이 돌아오면 해가 봉구지산을 넘는 늦은 시간에 산책을 나서게 됩니다.  기온이 다시 영하로 떨어졌습니다. 두건과 장갑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봉구산자락을 따라가는 산책길에 올라섰습니다. 옛길은 산자락을 일군 밭과 다랑구지 논의 경계를 지으며 해변으로 향합니다.밭가를 두른 폐그물 울타리에 갇힌 고라니가 나를 보고 당황스런 뜀박질로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전세계적 희귀종으로 전체 고라니의 90% 이상인 10만개체가 한반도에 살아갑니다. 산책을 나설 때마다 눈에 뜨이는 고라니가 ..

회상回想

어머니는 분해하셨습니다. 작년 초겨울, 우리집 뒤울안 화계花階에 심겨진 둥굴레가 고약한 누군가의 손을 탔습니다. 어머니는 여름 한철, 화계 꽃나무 주변 우거진 풀에 낫질을 하셨습니다. 풀숲에 숨어있던 뱀에 놀란 어머니가 낫질을 중동무이하는 바람에 잡풀에 숨어있던 둥굴레는 용케 도둑의 손길을 피했습니다. “내년 봄에 캐 차 끓이려고 했는데······” 2008년 11월 2일 나는 김포 한들고개의 옛집에서 어머니와 짐을 바리바리 꾸려 주문도 대빈창가는 언덕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다음해 봄 봉구산 외진 산사면을 타다 둥굴레 군락을 발견합니다. 포대에 둥굴레를 캐오자 어머니는 둥굴레 뿌리를 손질하여 얕은 불에 볶아 둥굴레 차를 끓이셨습니다. 잔챙이 뿌리를 마당가 텃밭 한구석과 화계에 심었습니다. 둥굴레의 번식..

갯벌을 걸어가는 기러기

굽을 곡, 갯벌 서, 떨어질 락, 기러기 안 - 곡서락안(曲漵落鴈).이 땅은 어디를 가나 뛰어난 여덟 풍광을 내세우는 팔경(八景)을 포진시켰다. 관동팔경, 단양팔경, 수원팔경, 영동 한천팔경, 정선 화암팔경······. 광역이고 기초고 자치단체마다 팔경(八景)은 존재했다. 이는 중국의 유명한 자연경승지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유래했다. 소상팔경이란 글자 그대로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라는 두 강이 어우러지며 연출한 경승 8가지를 가리켰다. 팔경은 장소가 아닌 자연풍광이었다. 산시청람(山市晴嵐)ㆍ어촌석조(漁村夕照)ㆍ소상야우(瀟湘夜雨)ㆍ원포귀범(遠浦歸帆)ㆍ연사만종(烟寺晩鐘)ㆍ동정추월(洞庭秋月)ㆍ평사낙안(平沙落雁)ㆍ강천모설(江天暮雪)을 말했다. 여기서 평사락안(平沙落鴈)은 ‘평평한 모래와 떨어져 흩어지는 ..

가을이 깊어가는 구나!

해가 많이 짧아졌습니다. 아침 산책을 반시간 뒤로 늦추었습니다.24절기 가운데 17번째 절기인 한로(寒露)가 지났습니다. 찬이슬이 맺히는 시기로 기온이 더 내려가기 전에 추수를 끝내야 하므로 농촌은 바쁘기 그지없는 때입니다. 여름 꽃들은 모두 지고, 가을 단풍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억새꽃이 한창입니다. 스러지기 전 서녘 하늘의 보름달이 낯이 아직 붉습니다. 한글 날 전야의 보름달은 유난히 붉었습니다. 바로 붉은 달, 불러드문(Blood Moon)으로 불러지는 개기월식이 일어났습니다. 개기월식은 태양과 지구, 달이 일직선상에 위치해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지는 현상입니다. '붉은 달' 현상은 태양에서 출발한 빛이 두터운 지구 대기권을 통과하면서 파장이 짧은 푸른빛은 모두 산란하고 붉은 빛만 남아 ..

가을의 끝, 비우다

절기는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을 지나, 겨울의 길목이라는 입동을 향하고 있습니다. 해가 많이 짧아졌습니다. 저의 산책시간은 아침저녁 6시입니다. 아침은 푸른 대기가 점차 엷어지면서 먼동이 터오고, 저녁은 시나브로 땅거미가 대기에 삼투압처럼 스며듭니다. 다랑구지 논들은 바리깡이 머리칼을 밀 듯 콤바인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밤중까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일을 합니다. 날이 차가워졌습니다. 이제 들녘은 텅 비었습니다. 모내고 두 달여동안 비만 퍼부어 농민들의 가슴을 까맣게 태우더니, 다행히 비 한 방울 줄금거리지 않은 가을볕이 꾸준해 평년작을 이루었습니다. 계절을 잊지 않은 기러기 떼가 논바닥을 덮었습니다. 녀석들은 기특하고 대견합니다. 추수가 시작될 무렵 찾아 온 진객이지만 볏대에 달린 이삭에 눈길도 주지 않습..

기러기 날아오르다...

해짧은 겨울은 벌써 사방에 어둠의 커튼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올 겨울은 눈이 흔합니다. 겨울 들어 내내 쌓인 눈이 섬을 온통 하얗게 덮었습니다. 집 뒤 봉구산 자락을 따라가는 옛길입니다. 산자락의 경사는 밭이고 길 아래는 바다까지 다랑구지 논들이 이어집니다. 교교한 달빛아래 길가의 갈대들이 흰머리를 풀어 헤치고 키를 늘였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는 곳에서 날개 짓 소리가 점차 고조되더니 끼오륵 ~ ~ 꺄륵 ~ 요란한 울음소리가 밤하늘에 울립니다. 기러기들이 일제히 날개를 펴고 하늘로 떠올랐습니다. 하늘을 까맣게 뒤덮었던 기러기들이 어느새 V자 편대를 이루어 밤하늘을 가로 지릅니다. 녀석들의 안온한 휴식을 제가 방해 놓았습니다. 기러기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신경이 아주 예민합니다. 인기척이 느껴지면 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