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409

김취려金就礪는 누구인가

강화도 하일리의 강화학파의 태두 하곡霞谷 정제두(鄭濟斗, 1649 - 1736)의 묘를 답사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주차장을 향해 길을 건너는데 기울어가는 겨울 햇살을 무엇인가 힘없이 되쏘았다. 하우고개 정상 못 미쳐 서있던 작은 입간판이었다. 단출했다. 문화재를 알리는 갈색 바탕과 성곽 문양 그리고 한글과 한자 네 자 뿐이었다. 〈김취려金就礪 묘墓〉. 나는 이름에서 거란과 몽고의 침략이 빈번했던 고려 말의 한 장수를 떠올렸다. 비가 잦았던 지난 여름이었다. 산길은 이리저리 패인 물길과 날카롭게 모서리를 내민 산돌로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두꺼운 이불처럼 산길에 쌓인 낙엽을 뚫고 어느 만큼 산속으로 들어서자 녹색바탕의 작은 이정표가 나타났다. 〈김취려 묘(문화재자료 제25호) ← 150m〉.잎을 떨 군 넓은..

하곡霞谷선생을 찾아 뵙다.

2020년 경자년 대설을 하루 지나 하곡霞谷 선생 묘를 찾았다. 진강산 서록을 넘는 하우고개 정상 공터의 〈정제두선생숭모비〉의 오석烏石이 빛바랜 겨울 해를 되쏘았다. 선생의 묘는 길가에 바투 자리 잡았다. 새로 조성된 주차장이 꽤나 넓어 보였다. 길 건너 묘소를 바라보면 봉분 두 개가 이어졌다. 길가까지 내려 온 산자락의 봉분을 잔솔과 떡갈나무, 밤나무가 에둘렀다. 빛바랜 낙엽이 메마른 잔듸위에 뒹굴었다. 앞의 봉분은 하곡 선생의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한산이씨韓山李氏의 묘였다. 묘비와 상석 그리고 홀을 든 문인석이 마주 보고 서있다. 긴 장대석으로 석축을 쌓아 구분한 선생의 묘 앞에 상석, 향로석, 망주석 2기와 2m 크기의 홀을 든 문인석이 좌우에서 시립했다. 실천적 지식인의 무덤가에 피어난 억새꽃이 ..

백운거사白雲居士를 찾아 뵙다.

나는 지금 출판사 《돌베개》에서 1996년에 출간한 『답사여행의 길잡이 7 경기남부와 남한강』의 291쪽에 실린 도판 〈이규보 묘소 전경〉을 들여다보고 있다. 새삼스럽다. 기억은 믿을만한 것이 못 되었다. 나의 발걸음은 25여 년 전 지역신문에 『강화도 답사기』를 연재하며 이곳을 찾았었다. 달포 전 위 이미지를 잡으며 조상의 묘역을 새롭게 단장한 문중의 정성이 갸륵하다고 생각했다. 25년 전, 기억은 봉분 앞 상석과 석등 그리고 망주석(望柱石) 한 쌍뿐으로 묘역은 조촐하다 못해 쓸쓸했다. 그런데 책의 도판에 낮은 돌담장에 둘러싸인 유영각(遺影閣)과 사가재(四可齋)가 자리 잡고 있었다.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1168 - 1241)의 묘는 강화 읍내에서 전등사 방면으로 301번 지방도로를 타다,..

뒷집 새끼 고양이 - 24

위 이미지는 오랜만에 우리집 현관문 앞에 나타난 재순이와 노순이입니다. 이른 아침 산책을 나서려 문을 밀치자 두 녀석이 반갑게 뛰어왔습니다. 포대의 개사료를 한 움큼 집어 문턱에 올려놓았습니다. 별명이 ‘미련한 놈’ 인 재순이는 응 ~ 응 고맙다는 뜻인지 웅얼거리면서 바로 코를 박았습니다. 조심성 많은 노순이는 멈칫멈칫하다 마당에 세워진 차밑으로 들어가 앞다리를 포개고 앉아 재순이가 먹는 것을 쳐다봅니다. 근 보름을 앓고 난 노순이는 예전처럼 사람을 따르지 않고 머뭇거립니다. 녀석은 현관의 문턱에 올라서 부엌에서 식사하는 우리 모자를 쳐다보며 맛있는 것을 달라고 냐 ~ ~ 옹! 조르기가 일쑤였습니다. 사람이 지나가면 머리를 종아리에 부비며 아양을 떨었습니다. 분명 녀석의 심리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재순이..

섬칫하다.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끔찍해 놀라 움츠러드는 느낌을 ‘섬칫하다’라고 합니다. 섬칫한 만남은 스무날 전에 있었습니다. 절기는 찬 이슬이 내린다는 한로(寒露)를 막 지나, 서리가 내려 겨울잠 자는 벌레는 모두 땅속으로 숨는다는 상강(霜降)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한글날로 시작되는 황금연휴의 마지막 날 오후였습니다. 늦봄에 캐 두었던 수선화 구근을 화계(花階)에 심었습니다. 호미로 굳은 땅을 헤집느라 맨발의 슬리퍼에 튄 흙을 씻으러 뒤울안 수돗가로 향하다가 녀석을 만났습니다. 어머니가 반찬거리 채소를 다듬거나, 손빨래를 할 때 앉는 깔방석에 1/3쯤 몸이 가렸습니다. 놈은 바닥에 고인 물에 삼각형 머리를 곧추세워 물을 들이켜고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요즘 시기가 독사의 독이 절정으로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자각..

볼음도의 흰 참새

문제는 사진작가들의 극성이었습니다. 흰 참새를 찍으러 전국에서 모여 든 사진가들의 일부가 원하는 이미지를 잡으려고, 너럭바위에 좁쌀를 잔뜩 뿌려 놓았습니다. 그들의 몰상식한 행동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앵글에 들어오는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경북 울진 소광리 산림보호구역의 220년 된 금강송을 베어냈습니다. 올해 6월 경북 경주시 황성동 황성공원의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후투티의 멋진 컷을 잡겠다고 피운 소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지난 7월 강원 춘천시 도심 주택가에 흰 참새 2마리가 나타나 화제가 되었습니다. 녀석들은 福이 새겨진 처마의 장식기와 앞 물받이에 앉아있었습니다. 한 놈은 멀리 허공에 시선을 두었고, 한 녀석은 글씨를 읽는 듯 물끄러미 한자(漢字)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후투티를 다시 만나다 - 2

해가 많이 짧아졌습니다. 절기는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한로를 막 지났습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시각, 산책을 나서려 운동화 끈을 조입니다. 대빈창 해변 바위벼랑에서 되돌아 섰습니다. 해송 숲을 지나쳤습니다. 다랑구지 들녘을 가로지른 느리 마을로 향하는 지름길을 버리고, 봉구산정을 바라보며 옛길로 들어섰습니다. 폐그물로 울타리를 두른 길가의 밭들은 끝물 고추를 달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름다운 깃털로 장식한 새 한 마리가 시멘트 포장길에서 깡총거리다 머리 위 전선줄에 앉았습니다. 나는 급히 주머니 속 손전화를 꺼냈습니다. 녀석은 분명 후투티였습니다. 아침 해가 봉구산 정상을 넘어오지 못한 이른 시간, 이미지는 흑백 실루엣으로 잡혔습니다. 인디언 추장의 머리를 장식한 깃처럼 후투티의 머리꼭대..

영재寧齋 선생을 찾아 뵙다.

선생은 양지바른 낮은 둔덕에서 후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산자락의 여기저기 자리 잡은 농가들 사이 고샅을 따라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나들길 4코스 해넘이길 표지석이 서있었다. 사석으로 자연스럽게 쌓은 계단을 오르자 계단참에 일주문처럼 아름드리 밤나무가 양옆에 도열했다. 가을이 익어가며 밤송이가 아람을 벌려 밤알을 잘 손질된 잔듸에 떨구었다. 다시 계단을 오르자 왼편은 사철나무가 일렬로 도열해 묘역을 구획 지었다. 김장채소 텃밭을 마당으로 삼은 구옥(舊屋)이 석축에 등을 기대었다. 오른편은 고라니 방책으로 그물을 두른 텃밭에 고추와 들깨가 심겼다. 봉분에 밝고 환한 햇살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묘 뒤편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처럼 가는 줄기 꼭대기에 솔잎을 매단 소나무 다섯 그루가 푸른 하늘..

뿌리인가, 줄기인가

카우리(kauri) 나무는 50m 이상 자라는 거대 수종으로 2천년 넘게 산다고 합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공대(AUT) 시배스천 루진저 조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웨스트 오클랜드 숲에서 살아있는 밑동을 발견했습니다. 나무는 잎을 통한 증산작용으로 뿌리에서 조직으로 물을 끌어 올립니다. 밑동은 광합성을 할 수 없습니다. 잎도 없는 밑동이 주변 나무들의 도움으로 150년 이상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약 150여 종에 달하는 나무들이 서로 뿌리를 연결시켜 가뭄 때 생존력을 높이고, 경사면에서 안정성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카우리 나무 밑동은 주변 나무들과 뿌리로 연결되어 물을 공급받아 살 수 있었습니다. 나무와 숲 생태계가 한 몸처럼 살아가는 ‘초개체(superorganism)' 를 가리키는 현상입니다. 프..

아차도 동방 등표의 초록 불빛

‘소라도 등대 등명기는 1분에 5회전했고 광달(光達)거리는 25마일이었다. 25마일 밖 해상에서 그 빛은 12초에 한 번씩 명멸하는 백색 섬광으로 보였다. 밤의 바다에서 어둠과 물보라에 가리워 섬은 보이지 않았고 12초에 한 번씩 깜박이는 불빛이 보였다. 12초 1섬광. 거기가 소라도였다.’(95쪽) 김훈의 소설집 『강산무진』(문학동네, 2006)에 실린 단편 「항로표지(航路標識)」의 한 문장이다. 서도(西島) 군도(群島)는 4개의 유인도와 9개의 무인도로 구성되었다. 바닷물이 차면 물속에 들어 보이지 않고, 바닷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여는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강화도와 서도를 오가는 카페리호의 선장은 베테랑이 조타수를 잡았다. 그만큼 숨어있는 여로 인한 위험 항로였다. 볼음도와 아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