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410

아차도 동방 등표의 초록 불빛

‘소라도 등대 등명기는 1분에 5회전했고 광달(光達)거리는 25마일이었다. 25마일 밖 해상에서 그 빛은 12초에 한 번씩 명멸하는 백색 섬광으로 보였다. 밤의 바다에서 어둠과 물보라에 가리워 섬은 보이지 않았고 12초에 한 번씩 깜박이는 불빛이 보였다. 12초 1섬광. 거기가 소라도였다.’(95쪽) 김훈의 소설집 『강산무진』(문학동네, 2006)에 실린 단편 「항로표지(航路標識)」의 한 문장이다. 서도(西島) 군도(群島)는 4개의 유인도와 9개의 무인도로 구성되었다. 바닷물이 차면 물속에 들어 보이지 않고, 바닷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여는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강화도와 서도를 오가는 카페리호의 선장은 베테랑이 조타수를 잡았다. 그만큼 숨어있는 여로 인한 위험 항로였다. 볼음도와 아차도,..

밤손님을 기다리다.

2020년 경자년(庚子年)은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6월 24일부터 8월16일까지 54일 간의 역대 가장 긴 장마로 기록되었습니다. 두 달여 동안 귓전에 끊임없이 청개구리의 금속성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비가 오면 청개구리가 슬프게 우는 게 논두렁에 모신 엄마 무덤이 떠내려갈까 걱정돼서 그렇데” 밥상머리에서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현상과 사물에 인성(人性)을 부여하시는 어머니의 귀에 장마기간 내내 들려오는 청개구리의 울음이 더욱 구슬프게 들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땅의 모든 이들이 어려서부터 귀에 딱지가 붙게 들어 온 ‘알 안 듣는 아이’의 상징 의 한 토막입니다. 옛날 청개구리 모자가 살았습니다. 아들 청개구리는 항상 엄마 청개구리의 말과 반대로 행동했습니다. 어깃장을 부리는 아들 청개구리로..

대빈창 길냥이 - 2

매일 갯벌을 드나들며 상합을 채취하는 이에게 들은 소식으로 정확한 정보였다. 대빈창 길냥이 형제의 내력이 밝혀졌다. 섬 주민 누군가가 새끼 고양이를 키울 자신이 없없다. 대빈창 해변 솔숲에 풀어놓았다. 가장 먼저 사라졌던 덩치 큰 놈은 맏이였다. 전출 가는 농협 지소장이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했다. 맏이가 먼저 분양되었으나 고향을 떠나기 싫었는지 가출했다고 한다. 고양이 새끼 세 마리는 버려진 수족관 밑을 보금자리 삼았다. 막내가 이웃 감나무집 식구가 되었다. 할아버지 집에 놀러 온 손자들이 해변에 놀러 갔다가 두 마리를 마저 집으로 데려왔다. 감나무집은 졸지에 고양이 세 마리의 주인이 되었다.동네 할머니 한 분이 감나무집에 마실을 갔다가 우리집에 들렀다. 고양이 세 마리가 할머니를 따라왔다. 할머니는 ..

대빈창 길냥이

나비야 ~ ~ 녀석들이 보이지 않았다. 야 ~ ~ 옹! 대꾸하며 두 놈이 은신처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화장실 뒷벽 창문턱에 얹어놓은 비닐봉지의 사료를 꺼냈다. 배가 고픈 지 녀석들이 허둥지둥 쫓아왔다. 플라스틱 그릇에 담아 녀석들 앞에 놓았다. 폭풍흡입이었다. 녀석들을 만난 지 보름이 지났다. 그날 저녁 산책이었다. 솔숲 캠핑장에 들어서는데 주먹만한 고양이가 나를 보고 야! 옹 가냘픈 소리로 아는 체를 했다. 녀석들의 은신처는 버려진 수족관 밑이었다. 예닐곱 해가 지났을까. 대빈창 마을주민 한 분이 해변에 계절 간이식당(함바집)을 내었다. 그 시절 성수기의 대빈창 해변은 피서 온 사람들로 제법 북적였다. 식당은 수족관에 살아있는 농어·숭어를 풀었다. 해변을 찾은 도시인들의 횟감용이었다. 어느 해 북한에 ..

대벌레를 아시나요

2020년 경자년(庚子年)의 대서(大暑)는 7월 22일이었습니다. 대서(大暑)는 24절기 중 열두 번째로 소서(小署)와 입추(立秋) 사이에 들며, 중복(中伏) 때로 더위가 심한 시기입니다. 대서라고 아침 산책을 미룰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알람소리에 눈을 뜨고 헌 운동화를 발에 꿰었습니다. 대기의 푸른 기운이 점차 가시고 먼동이 터오고 있었습니다. 발이 마음보다 앞서 몸을 이끌었습니다. 장마전선이 북상하여 많은 비를 쏟아붓고 어제밤부터 잠시 주춤했습니다. 허공을 한 움큼 움켜쥐면 물이 방울방울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반환점 바위벼랑에서 내처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랐습니다. 물먹은 대기처럼 축축 처지는 몸을 끌다시피하며 나무테크 계단 정상에 간신히 올랐습니다. 지친 몸을 얹힐 요량으로 방부목 기둥에 팔을 뻗는데..

내숭쟁이 대박이

대박이가 보이지 않은지 열흘이 되었습니다. 아침저녁 산책이 허전하기 그지없습니다. 가끔 텃밭에 나와 농사일을 하는 주인부부에게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말이 씨가 될지 겁이 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요. 주문도 느리 선창에서 대빈창 해변 가는 길은 들녘을 가로지르는 아스팔트 농로입니다. 들녘이 끝나는 지점에 사거리가 나타납니다. 왼쪽 길은 봉구산자락으로 향하는 옛길입니다. 오른쪽 길은 자연부락 대빈창 마을입니다. 왼쪽 길로 접어들면 나즈막한 구릉에 기댄 외딴 집이 나타납니다. 몇 년 전만해도 옛길을 따라 몇 필지의 밭이 이어졌던 곳입니다. 초로의 부부가 새 집을 짖고 이사를 왔습니다. 주인네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대박이의 이름을 알았습니다.대박이는 덩치가 아주 큰 녀석이었습니다..

고라니, 길을 잃다.

고라니는 소목 사슴과에 속하고, 노루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몸체가 작습니다. 암수 모두 뿔이 없으나 수컷은 송곳니가 튀어나와 구분된다고 합니다. 녀석들은 뜀뛰기 선수로 사람 그림자만 보여도 쏜살같이 내달려 실제 수컷인지 암컷인지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고라니의 검은 눈망울은 금방 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슬프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녀석들의 담갈색 털은 억세기 그지없습니다. 고라니는 초식동물로 연한 나뭇잎과 새순을 탐합니다. 푸른잎이 귀한 겨울철은 풀·나무뿌리와 여린 나뭇가지로 연명합니다. 어느 해 눈이 많았던 겨울, 녀석들은 울타리로 둘러진 사철나무 잎을 뜯어 먹었습니다. 신경통·관절염에 고라니 뼈가 직통이라는 민간요법에 전해오는 속설로 녀석들은 줄곧 수난을 당했습니다.뜬금없이 물 빠진 갯벌 한 가운데 고라..

까마귀와 고양이

열흘 전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봉구산자락 옛길 오르막에 오르자 부푼 바다가 보였습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의 대기는 희부염했습니다. 바다건너 석모도가 흐릿했습니다. 뒷집은 봉구산 등산로 초입 밭을 내놓았습니다. 대처 사는 외아들의 아파트 입주로 목돈이 필요했습니다. 서울 사람이 땅을 샀습니다. 뒷집 부부는 농사를 계속 지었습니다. 비닐피복을 씌운 두둑에 옥수수가 심겼습니다. 맨 땅은 참깨 모를 낼 예정입니다. 그때 밭 가운데 서로 노려보는 짐승이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분명 검돌이였습니다. 구박덩어리 검돌이도 새끼를 뱄습니다. 노순이와 새끼들을 끔찍이 아끼는 뒷집 형수지만 검돌이는 눈 밖에 났습니다. 형수가 거름으로 던진 수박껍질에 녀석은 불쌍하게 코를 박고 있었습니다. 까마귀도 허기가 졌는..

찔레꽃 피는 계절

황해(黃海)의 작은 외딴섬 주문도의 찔레꽃 피는 계절은 소만(小滿)과 망종(芒種) 사이입니다. 24 절기 중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절기입니다. 소만은 만물이 자라서 세상을 가득 채운다라는 뜻에서 유래했습니다. 망종은 논보리나 벼 등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을 파종하는 시기라는 뜻입니다. 주문도 대빈창가는 길 다랑구지의 모내기가 한창입니다. 년중 농부들에게 가장 바쁜 농번기입니다. 밭에 고추와 고구마 심기를 마친 섬주민들이 모내기에 힘을 쏟았습니다. 봉구산자락에서 내려다보는 다랑구지가 하루가 다르게 푸르게 변해갔습니다.어르신네들은 뻐꾸기가 울고 찔레꽃이 피면 비가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조들의 오랜 경험은 기상청보다 날씨예보가 정확합니다. 주문도에 삶터를 꾸리고, 요즘시기 물 부족을 겪지 않은 해가 없었..

민중미술 박진화 화백을 아십니까 - 2

위 이미지는 스무날 전 오후 2시30분경에 잡은 이미지입니다. 삼보6호 2항차로 볼음도에 닿았습니다. 화백의 작업실 주변은 여느 때나 다름없이 고적했습니다. 출입문 손잡이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클래식이 흘러나왔습니다. 현관 칸막이에 막혀 실내의 동향을 알 수 없었습니다. 화백은 오늘도 산책을 나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이며 칸막이를 돌아섰습니다. 캔버스를 두 손으로 들고 벽으로 다가서는 화백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나는 소리 없이 한 컷 이미지를 담았습니다. 칸막이를 손바닥으로 두서너 번 가볍게 내리치자 예의 악동 웃음을 지으며 화백이 뒤돌아섰습니다.불을 밝힌 풍로가 놓인 소파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화백은 머그컵에 약초달인 물을 가득 부어 내 앞에 내놓았습니다. 나는 연초 뉴욕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