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410

대빈창 들녘의 바람인형

바야흐로 24절기節氣 가운데 여덟 번째 소만小滿입니다. 입하立夏와 망종芒種 사이에 듭니다. 옛날 손모를 내던 시절은 모의 성장기간이 45-50일이 걸려 모내기를 준비했으나, 요즘의 부직포 모판은 40일 이내에 모가 자라 모내기가 시작됩니다. 1년 중 가장 바쁜 계절입니다.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챙겨 대빈창 들녘으로 나섰습니다. 어제 아침산책에서 풍경을 처음 만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내심 마음먹었지만 거짓말처럼 장면이 사라졌습니다. 아침 해가 마니산 위로 떠올라 석모도 해명산 위로 성큼 다가섰습니다. 나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사진을 찍고 농로를 벗어나자 못자리 주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습니다. “중국제인데 값이 비싸더라고. 둘째가 인터넷으로 산거야.” 논 주인은 해가 떨어지면 전..

해가 갈수록 묵정밭

미국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Alan Weisman)이 2007년에 출간한 『인간 없는 세상』은 인간이 지구에 끼치는 해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그로 인해 후손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있는지를 경고했다. 저자는 한국의 환경운동연합팀과 함께 DMZ를 방문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천만하던 곳은 사라질 뻔했던 야생동물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반달가슴곰, 스라소니, 사향노루, 고라니, 담비, 멸종 위기의 산양, 거의 사라졌던 아무르표범이 매우 제한된 이곳의 환경에 의지해 산다.’(260쪽) 길이 241㎞, 폭 4㎞의 구역은 1953년 9월 6일부터 인간 없는 세상이 되었다. 한국의 비무장지대다. 인간들이 없어지자 동족상잔의 지옥이 야생동물들이 가득한 곳으로 변했다. NLL(Northern Limi..

5월은 가정의 달

우리집은 봉구산자락에 앉았습니다. 단층집 옥상 슬라브는 봉구산을 오르는 진입로와 높이가 비슷합니다. 뒤울안의 경사면은 화계花階로 꾸몄습니다. 마당에서 계단을 내려서면 텃밭입니다. 텃밭은 대략 40여 평으로 대빈창 해변으로 향하는 언덕을 깎아 석축을 쌓았습니다. 언덕을 오르며 우리집을 바라보면 영락없이 이층집입니다. 1층 3칸은 창고로 농기구와 퇴비포대 그리고 진돗개 트기 느리가 한 칸을 집으로 삼았습니다. 김포 통진에서 서해의 작은 외딴 섬 주문도로 삶터를 옮긴 지 15년이 흘렀습니다. 2007년 여름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화장 유골을 봉구산 아름드리나무 밑에 가매장 했습니다. 초겨울 이삿짐을 옮기고 다음해 봄, 산림조합의 나무시장에서 3년생 모과나무를 들여왔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

복수초가 깨어나다.

우리집 뒤울안 화계花階의 복수초가 깨어났습니다. 작년 늦봄 화분가득 옮겨 온 복수초를 포기 나누어 화계에 심었습니다. 주문도에 삶터를 꾸린지 15년 만에 이룬 경사입니다. 저는 사진으로 보았던 쌓인 눈은 뚫고 올라온 봄의 전령 노란꽃을 보고 싶었습니다. 이른 봄 새순이 나와 눈 속에서 꽃이 피어 설연雪蓮이라고 불렀습니다. 제주도 한라산 해발 600m 지점의 북쪽 나무 우거진 숲속은 2월 하순이면 노란꽃을 피어 올렸습니다. 경기도 깊은 골짜기는 3월 중순에 꽃을 볼 수 있습니다. 꽃이 피면서 눈과 얼음을 뚫고 올라와 둥근 구멍이 생겨 얼음새꽃, 눈색이꽃이란 부르기도 합니다. 강한 생명력으로 이름이 붙은 복수초(福壽草, Adonis amurensis)는 이른 봄산에 가장 먼저 꽃피어 월일초라 불리기도 합니다..

루저 기러기 가족

만우절이 엊그제였습니다. 위의 이미지는 한주일전에 산책에 나섰다가 잡은 컷입니다. 거짓말처럼 기러기 한 가족 일곱 마리가 대빈창 다랑구지 들녘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루저loser 가족처럼 보였습니다. 도대체 녀석들은 제 갈 길을 못가고 여적 서해의 작은 외딴 섬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논을 쓸리기 위해 지하수를 퍼 올리는 논배미에서 녀석들은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내가 지나치기를 기다리며 숨을 멈추었던 놈들은, 주머니에서 손전화를 꺼내들자 덩치 큰 놈이 먼저 날개짓을 했습니다. 위험하니 피하라!는 신호 같았습니다. 일가족이 허공에 떠올랐습니다. 기러기들은 정확히 주문도의 벼베기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늦가을 여섯 마리가 먼저 눈에 뜨이더니, 벼베기를 마친 필지마다 기러기떼가 새까맣게 앉았습니다...

도마뱀을 만났다.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춘분春分 정오正午가 조금 지난 시각, 몇 년만이었을까. 나는 녀석을 만났다. 점심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빈창 사거리에서 봉구산으로 향하는 오른쪽 농로로 접어들었다. 야산아래 외딴집을 지나는데 무엇인가 알지 못할 느낌이 나의 시선을 땅바닥으로 향하게 했다. 그랬다. 콘크리트 바닥에 배를 붙인 녀석이 꼼짝 않고 내가 지나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놈은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몸의 피를 덥히고 있었을까. 도마뱀은 짧은 동강을 나타내는 ‘도막’에 뱀을 붙여서 만든 단어다. 분류학적으로 도마뱀(Smooth skink)과 뱀의 구분은 두개골의 모양과 눈꺼풀을 움직일 수 있는 여부로 판단한다. 뱀은 아래턱이 붙어 있지 않아 큰 먹이를 물 수 있지만, 도마뱀은 턱이 빠지지 않아 입 크기에 ..

살얼음 이는 바다 Ⅱ

절기는 바야흐로 땅 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와 벌레들이 활동을 시작한다는 경칩驚蟄을 지나,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춘분春分을 향했습니다. 두꺼운 겨울옷을 걸치고 아침산책에 나섰습니다. 어젯밤에 난데없이 한파寒波주의보가 떨어졌습니다. 발령기준은 세 가지입니다.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2℃ 이하인 날이 2일 이상 지속될 때, 전날에 비해 10℃ 이상 떨어진 기온이 3℃ 이하면서 평년보다 3℃ 낮을 때, 저온현상으로 일부 지역에서 피해가 예상될 때​. 어제 한파는 두 번째에 해당됩니다., 낮 기온이 15℃ 이상 올라, 몸을 움직이면 때 이른 더위를 느낄 만큼 따뜻한 날이 연일 이어졌습니다. 어제 새벽기온이 영하 2℃까지 떨어졌습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가 추위에 화들짝 놀라 다시 땅속으로 들어갔는지 ..

이제, 일 밖에 안 남았네

절기는 날이 풀려 봄기운이 돋고 초목이 싹트는 우수雨水를 지나, 땅 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와 벌레들이 활동을 시작한다는 경칩驚蟄이 사나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2023년 계묘년癸卯年에도 여지없이 2박3일의 농기계수리가 지난 주에 있었습니다. 위 이미지는 모퉁이돌 선교원 훈련원의 운동장입니다. 주문도의 옛 서도 초등학교 자리입니다. 트랙터, 경운기, 이앙기, 관리기, 예초기, 분무기, 양수기, 엔진톱, 트레일러, 오토바이까지 나래비를 섰습니다. 영농철이 다가오면서 쇠소(鐵牛)들이 몸을 푸는 현장입니다. 지지난 주에 안타까운 사고가 터졌습니다. 이장의 웅~ ~ 웅 거리는 마을방송 소리에 덧창문을 열었습니다. 방송을 들으시는 주민들은 진화 도구를 가지고 연못골로 급히 나오라는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산불..

뒷집 새끼 고양이 - 37

위 이미지는 노랑이가 뒷집 광문 앞 플라스틱의자 밑에 들어가 사료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녀석은 저녁 산책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바랬습니다. 지난 겨울 뒷집 형네 부부가 두어 번 열흘 이상 집을 비웠습니다. 나는 기력이 떨어지신 어머니의 빙판으로 변한 바깥출입을 말렸습니다. 뒷집 짐승들의 먹이를 챙깁니다다. 아침 산책을 나서며 텃밭가 닭장 50여 마리 닭의 하루치 물과 모이를 듬뿍 먹이통에 쏟아 부었습니다. 고양이 재순이(미련한 놈), 노순이(영리한 놈), 노랑이(개구쟁이)의 끼니를, 아침과 저녁으로 사료를 밥그릇에 챙겼습니다. 노순이는 나이가 들어 이빨이 시원치 않습니다. 사료 몇 알을 우물거리다 이내 뒤로 물러납니다. 재순이의 식탐은 날이 갈수록 사나워졌습니다. 노순이와 노랑이의 식사는 광안에서, ..

고라니는 쓸개가 없다 - 3

내가 사는 서해의 작은 외딴 섬 주문도는 밤낮을 가리지않고 고라니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그때마다 두 귀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뼛속마저 울리는 극한의 고통스런 울음은 듣는 이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다. 녀석은 목을 파고드는 올가미나 발목을 조여드는 덫에 피를 흘리며 순한 눈동자에 가득 눈물을 머금었을 것이다. 나는 니빠로 철사를 끊거나 빠루로 덫의 아가리를 벌리는 공상에 빠져들었다.모르는 이의 근심과 걱정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환경운동하는 작가’ 최성각의 산문집 『산들바람 산들 분다』(오월의봄, 2021)를 읽고 나의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고라니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은 죽음을 앞둔 단말마의 비명이 아니었다. 암컷에게 알리는 번식기의 수컷 울음소리였다. 어째 순하디순한 눈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