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410

신영복 선생 붓글씨 달력

나는 새해가 돌아오면 이철수 판화달력이나 신영복 선생 붓글씨달력을 걸었다. 2022년 임인년壬寅年과 2023년 계묘년癸卯年은 연속 붓글씨달력이었다. 올해도 여지없이 달월을 가리키는 숫자 옆에 《禁酒》를 붙였다. 의지박약자의 자기다짐이었다. 1月의 큰 글씨는 ‘처음처럼’이었다. -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추운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서울 볕내 남골 쇠귀 - 글씨 한 귀퉁이의 그림은 이제 막 솟아난 새싹 위로 어린 새가 날고 있었다.내가 이 글귀를 처음 만난 책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햇빛출판사, 1998)이었다. 선생의 글씨체를..

강화도서관

30여 년을 넘어선 나의 독서 이력은 도서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산화되기 이전 대출카드라 불렀던 북카드(book card) 시절 리포트 참고도서를 구하려 강화도서관을 두서너 번 찾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 시절 군립도서관은 한옥교회 성공회聖公會 강화성당 뒤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야 만날 수 있었다. 자칭 활자중독자인 내가 군립도서관을 찾게 된 것은 내 방에 더 이상 책을 들여놓을 공간이 부족해서였다. 이후 나는 부피가 얇은 시집을 온라인 서적을 통해 구매했고, 나머지 책들은 도서관에서 대여했다.새삼 《강화군립도서관》에서 발행한 〈책이음 전국 공공도서관 이용증〉을 들여다보니 발행일자는 없고 회원번호만 적혀있다. 첫 대출일자가 2019년 6월 13일이었다. 이날 회원증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뒤 나는 3주 간..

큰형의 죽음 - 2

나는 조카에게 봉투를 건네며 친척 어르신들이 찾아왔을 때 지킬 예를 몇 가지 일러주고 물었습니다. “남긴 말씀이라도 있으셨느냐” “아버님은 가족 형제끼리 화목하게 지내라고”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하느님은 나를 너무 빨리 데려가시는구나.” 큰형은 삶에 크게 애착을 가지셨다고 합니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에 비해 큰 형의 69세는 때 이른 죽음이었습니다. 사실 큰형과 나의 우애는 아버지 죽음을 계기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는지 모르겠습니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섬에 모시면서 나는 큰형네로 향하는 발길을 끊었습니다.장례식장에서 하루를 묵고 섬에 들어온 나는 이틀을 자고 발인날 아침, 첫배에 올랐습니다. 작은형은 새벽같이 인천집을 나서 장례식장 발인을 지켰고, 운구 행렬의 영정을 들었습니다. 김포성당 미사..

큰형의 죽음 - 1

이미지는 계묘년癸卯年 첫날 아침, 해가 강화도 마니산 산줄기 능선위로 떠올랐습니다. 일출시간 아침 8시에서 5분이 경과한 시점입니다. 나는 올해도 임인년壬寅年 첫날처럼 살꾸지 선창에서 해돋이를 맞이할 생각이었습니다. 2022년의 마지막 날, 점심을 먹고 습관이 된 오수에서 막 깨어났는데 손전화가 울렸습니다. 조카의 음성에 물기가 잔뜩 묻었습니다. 큰 형은 12. 31. 13:29에 눈을 감으셨습니다. 다행히 날씨가 온화해서 막배가 출항했습니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지방도는 오고가는 차량이 가득했습니다. 일몰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대처 사람들은 마지막 해넘이에 의미를 부여하며 서해의 섬 강화도로 몰려들었습니다. 고인은 그동안 치료받던 일산병원에서 사시던 김포시내 장례식장으로 모셔졌습니다. 형..

임인년壬寅年 해넘이

임인년壬寅年의 해가 저물어갑니다. 섣달 스무날이 지난 어느날 저녁 산책에서 잡은 대빈창 해변 이미지입니다. 바닷물은 만조입니다. 수평선 위에 엷은 구름띠가 드리웠고, 무인도 분지도는 역광을 받아 검은 음영을 드리웠습니다. 해가 바다로 발을 들이미는 순간입니다. 올 한해는 한마디로 단순소박한 삶의 나날이었습니다.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나의 시간으로 부여받아 그런대로 잘 꾸며왔다고 여깁니다. 나의 노동은 고작 텃밭의 작물을 돌보거나 이웃집들의 고추건조 작업을 돕는 정도였습니다. 하루세번 한 시간 거리의 대빈창 해변 산책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비나 눈이 오는, 궂은 날은 할 수없이 스쿼트 머신으로 30분정도 몸을 움직였습니다. 3주에 한 번 읍내의 도서관에 둘러 책을 대여했습니다. 도서 대여기간이 3주이기 ..

그 많던 기러기들은 다 어디 갔을까

나의 산책 코스는 알파벳 대문자 V자字 또는 빗살무늬토기의 바깥 면을 따라가는 형상입니다. 토기의 아가리에서 출발해 바깥 선을 따라 뾰족한 바닥에 닿으면 봉구산 자락의 고추밭입니다. 사람이 밭으로 일구기 전에는 봉구산에 내린 빗물이 한데 모여 바다로 쓸려나가는 계곡이었을 것입니다. 토기의 아가리 부분은 바다와 다랑구지 들녘을 경계 지은 제방입니다. 제방너머 푸른 바다를 볼음도와 아차도, 주문도 바우지가 삼각형으로 에워쌌습니다. 이미지의 다랑구지는 한 필지도 남김없이 가을갈이를 했습니다. 강화도․교동도․석모도 들녘은 커다란 비닐 물체가 시린 겨울 햇살을 튕겨내고 있었습니다. ‘볏짚 원형 곤초 사일리지’로 볏짚에 미생물 첨가제를 처리하여 비닐로 감싼 소사료입니다. 코로나 정국으로 인한 조사료 공급부족으로 소..

터너의 붓질

나는 여는 때처럼 대빈창 해변 저녁 산책에 나섰다. 북유럽의 피요로드 해안처럼 볼음도의 실루엣이 바다로 길게 뻗어 나왔다. 소용돌이치는 검은 구름이 수평선으로 다가서는 일몰의 해를 집어삼켰다. 빠르게 흩어지는 구름 속에 중앙 상단의 낮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 먹구름과 푸른 하늘이 만나는 지점에 무지개가 서렸다. 제주 바닷가의 용두암龍頭巖이 연상되었다. 자연주의 시인 다이앤 애커먼의 『나는 작은 우주를 가꾼다』를 잡다, 이 구절을 만났다. ‘폭풍우를 그린 영국 화가 터너는 자신을 돛대 위에 묶고 포효하는 폭풍우 속에 자신을 맡기면서 광분하고 용솟음치는 색깔을 몸으로 느꼈다.’(181-182쪽) 그렇다. 나의 뇌리에 떠오른 이미지는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기력이 떨어지셨다.

휠체어에 앉으신 어머니가 4층 휴게실 옆 공간에서 옥상 정원의 낙엽 지는 나무에 하염없이 눈길을 주고 계셨다. 어머니가 왼쪽 고관절 부위 통증을 호소하시며 서있기도 힘들어하셨다. 나는 겁이 더럭 났다. 어머니는 육칠년 전 척추협착증과 오른쪽 고관절 큰 수술을 잘 이겨내셨다. 삼사년 전 폐렴으로 같은 병원에 입원하셨다. 별탈없이 지내오시던 어머니가 제 한 몸 가누기도 힘겨워하셨다. 정형외과를 찾아 X-ray를 찍으니 아무 이상이 없었다. 서울 위성도시의 대학병원 의사 선생은 MRI를 권유했고, 퇴근도 미룬 채 판독결과를 기다리셨다. 다행스럽게 이상은 없었다. 섬에 들어가는 배는 끊어졌다. 시흥에 사시는 이모집으로 향했다. 몸이 불편한 자매의 회포는 동병상련의 아픔이었다. 다음날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에 도착..

대빈창 억새

위 이미지는 24절기 가운데 한로와 입동 사이에 드는 열여덟 번째 절기 상강霜降을 며칠 남긴 대빈창 억새이다. 상강은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고 밤에는 기온이 매우 낮아, 수증기가 지표에서 엉겨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의 계절이다. 아침 산책에서 물 빠진 갯벌에서 쉬고 있는 고단한 기러기들의 애먼 날갯짓이 미안해 발길을 돌려 반대방향 제방을 탔다. 제방 끝은 마을공동어장 구라탕으로 내려서는 길목이었다. 바람에 쓸려 온 모래가 쌓여 작은 둔덕을 이루었고 억새가 뿌리를 내렸다. 제방 끝은 월파벽 공사를 막 끝내 토목 자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포클레인이 빈 공터를 차지했고, 거푸집이 차곡차곡 쌓였다. 일을 끝내고 뭍으로 나간 인부들이 고마웠다. 그들은 억새 한 포기 건드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억새와 갈대를..

임인년壬寅年 기러기

임인년壬寅年 벼농사 수확이 시작되었고 기러기가 날아왔다. 스무날 전 몇 필지의 중생종 진상을 수확한 논에 내려앉은 한 가족으로 보이는 여섯 마리가 첫 손님이었다. 열흘 전 본격적인 주문도 대빈창 들녘의 만생종 삼광・추청 벼베기가 시작되었다. 놈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새카맣게 다랑구지 들녘에 몰려들었다. 나는 기러기들이 대견했다. 녀석들은 논에 서있는 알곡에 절대 입을 대지 않았다. 콤바인이 수확하면서 논바닥에 흘린 벼알만 주워 먹었다. 이미지는 한 주일전 점심 산책으로 봉구산 자락을 벗어나 대빈창 해변으로 향하는 옛길에 올라섰을 때 인기척에 놀라 하늘로 떠오른 기러기떼였다. 올 해는 여는 해보다 많은 기러기가 날아왔다. 날이 갈수록 놈들의 수가 무섭게 불어났다. 벼를 벤 논에 내려앉은 기러기가 빈틈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