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408

귀토야생기(歸兎野生記) - 5

산천초목이 성글어가는 계절입니다. 엊그제가 입동이었습니다. 꼬마토끼 토진이가 폐선 앞 모래바닥에서 해바라기를 합니다. 낙엽 진 아까시잎이 땅바닥을 온통 덮었습니다. 폐선 앞자리만 둥그렇게 모래가 드러났습니다. 짧아지는 해지만 오후 내내 온기로 데워진 모래에 토진이가 배를 깔고 편하게 누워 몸을 덥힙니다. 한여름 무더위와 진드기의 극성을 이겨내고 녀석은 두 번째 겨울맞이를 준비합니다. 작년 초봄 녀석을 처음 만났습니다. 시든 초목에 연두빛 생명이 차오르기 전이었습니다. 인기척에 놀란 녀석이 제방도로 포장공사 돌 틈에 몸을 숨겼습니다. 온통 흰 몸뚱이에 배트맨의 로빈처럼 안경을 쓴 것처럼 눈 주위만 까만 녀석을 처음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머물렀습니다. 겨울을 나는 동안 녀석은 가끔 눈에 뜨였습..

나의 산책길

산책길에 오릅니다. 다랑구지 들녘을 가르는 대빈창 해변 가는 길을 버리고 뒷울안을 감싸 도는 산길을 택합니다. 길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봉구산 등산로와 산자락을 따라가는 옛길입니다. 고구마밭 첫머리 용틀임한 나이 먹은 소나무가 반겨줍니다. 나의 산책길은 봉구산자락 옛길을 지나 해변 제방길로 이어집니다. 섬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이리저리 휘어지며 통과하는 길입니다. 섬 주민들의 경제활동 영역입니다. 어제는 입동이었습니다. 왼쪽 이미지의 논밭은 텅 비었습니다. 봉구산 자락과 여맥을 일군 밭에 고추, 고구마, 참깨, 들깨, 서리태(콩), 뚱딴지(돼지감자), 땅콩이 심겼다가 거두어졌고, 김장철을 맞아 배추, 무, 쪽파, 대파의 수확도 끝나갑니다. 푸른 하늘아래 논밭 끝머리 낮은 구릉의 잡목 숲 음영이 하루가 다..

흑염소 가족 3代

막 벼를 벤 논에 흑염소 3마리가 묶였습니다. 아니 목줄이 없는 새끼염소에게, 줄 메인 어른염소 2마리가 서로 스킨십을 합니다. 흑염소는 우리나라 재래종으로 수컷에게 수염이 있고, 한 배에 2마리의 새끼를 낳는다고 합니다. 아! 흑염소가 재래종이었구나. 저는 어릴 때 늘 흰 염소만 보고 컸기에 흑염소가 재래종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의아했습니다. 고향 김포 들녘 시골마을의 유일한 염소는 흰 놈이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대학시절 살아있는 염소보다 먹거리로 놈과 친했습니다. 짝사랑하던 여학생 집은 흑염소탕 전문점이었습니다. 연일 술독에 빠져 살던 저는 술이 덜 깬 이른 아침부터 흑염소탕 국물을 후룩 거렸습니다. 여학생을 보기 위해 술에 부대 낀 속을 흑염소탕 국물로 달랬습니다. “저 놈들이 아침 운동하게 만든다니..

모과에 앉은 청개구리

“에미 무덤을 논두렁에 써서 비가 오면 떠내려 갈까 청개구리가 우는 거래.” 어머니가 말씀하십니다. 조그만 녀석의 금속성 울음이 찢어질 듯 요란합니다. 모과 열매에 청개구리 한 마리가 앉았습니다. 청개구리가 마구 울어 비가 퍼 부었으면 좋겠습니다. - 2007년 8월 8일(음) / 안셀모 / 자연으로 돌아가시다. - 모과나무 옆 누워있는 작은 비석에 새겨진 문구입니다. 아버지가 안식을 취하신 모과나무는 수령 10년이 되었습니다. 모과나무가 그럴듯하게 열매를 매달았습니다. 그동안 1 ~ 2개가 고작이었습니다. 30여개 모과가 새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무게를 받쳐주려 줄을 매었습니다. 올해 아버지가 식구들에게 모과를 내주셨습니다. 가을이 깊어 가면서 열매가 연두에서 노랑으로 변해갑니다. 모과를 과도로 얇게..

선창에 토끼가 나타났다.

하루 두 번 강화도와 서도 군도(群島)를 오가는 삼보12호는 볼음도, 아차도에 기항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문도 느리 선창에 여객을 부립니다. 주문도와 아차도가 마주보는 내해(內海)에 정박합니다. 배에서 내리면 뱃사람들이 어구를 손질하는 넓은 물량장이 선창에 잇대었습니다. 주문도 매표소·선양식당(1층 식당, 2층 민박)·여인숙 간판이 붙은 가정집·인천해안경비안전서 서도대행신고소·한 달 전 주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구멍가게. 길가 공터를 일군 텃밭·모퉁이 집·하얀쪽배 펜션이 야산 절개지에 등을 바싹 기댔습니다. 폭 좁은 아스팔트길이 해안을 따라 이어지고, 바다에 접한 월파벽이 길을 따라 갑니다. 유두·백중사리 때 월파벽에 바닷물이 찰랑거립니다. “벼 알 여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어르신네 말씀처럼 가을..

귀토야생기(歸兎野生記) - 4

느리 선창에서 대빈창 해변으로 가는 길모퉁이 집 텃밭의 작물은 뼈대만 남았습니다. 애완용 토끼 두 마리가 우리를 나와 마구 잎사귀를 뜯어 먹었습니다. 주인네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습니다. “도대체, 이놈들이 어디로 나오는 지 통 모르겠어.” 털북숭이 녀석들은 밤이면 가로등이 밝혀진 선창가에서 제멋대로 뛰어놀기 일쑤입니다. 한 녀석은 사고라도 났는지 오른 뒷발을 절름거립니다. 오늘도 우리를 탈출해 길가의 풀을 뜯는 토끼를 귀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동네 아낙네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대빈창 해변 바위벼랑 공터에 강아지 네 마리를 기르고 있습니다. “요즘, 토끼 한 마리가 안 보이는 것 같아요.” “벌써 한 달이 다 되었어요. 아마! 솔개가 채 간 것 같아요” 말을 하면서도 내심으로 토순이가 산 속으..

귀토야생기(歸兎野生記) - 3

‘민들레길에 접어들었건만, 다른 때와 달리 연구소 마당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전 같으면 멀리서 내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요란하게 울어대야 하는데, 그날은 너무 조용했습니다.’ 소설가 최성각의 생태소설 『거위, 맞다와 무답이』에서 춘천 퇴골 풀꽃평화연구소 마당을 삶터로, 2년여 喜怒哀樂을 함께한 암수 거위 ‘맞다’와 ‘무답’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순간입니다. 암수 거위는 수리부엉이에게 일을 당했습니다. 대빈창 해변 제방을 따라 바위벼랑으로 다가서면 토끼들이 하나 둘 눈에 뜨입니다. 수놈 토돌이는 어느새 어른이 다 되었습니다. 큰 덩치에 걸맞게 식탐이 대단합니다. 활동 영역이 넓은 녀석은 가장 먼저 눈에 뜨입니다. 녀석은 호기심도 강합니다. 손바닥을 펴서..

어머니의 망중한

망중한(忙中閑)의 뜻은 ‘바쁜 가운데의 한가한 틈’을 말한다. 어머니 인생의 망중한은 과연 있었기나 한 것일까. 어머니가 병원 10층 복도에서 보행 보조기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셨다. 7월 1일 어머니가 대학병원에 입원하셨다. 어머니는 이른 새벽 아침과 점심을 밥통에 앉히고, 앉은뱅이 밥상에 냉장고의 반찬을 꺼내 나의 출근 전 밥상을 차렸다. 점심을 먹으러 집에 오면 어머니는 항상 누워 계셨다.“어머니. 왜 매일 누워만 계세요. 어디 편찮으세요.”“나이 먹어서 그런지. 움적거리는 게 귀찮다. 나아지겠지.”누이와 동행하여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면서 나의 무신경에 화가 솟구쳤다. 어머니의 고통에 이렇게 무딜 수가 있다니. 어머니의 건강에 조금 만 신경을 썼더라도 어머니가 앉은뱅이 생활을 하셨다는 것을 눈치챘을 ..

저수지의 치욕

어떤 물고기도 낳지 못할 바에는 / 불을 피우지 그래 / 무더운 날은 / 활활 타오르는 가슴이라도 후벼파야지 / 들춰진 치맛자락에서 / 서투른 방생을 보았지 / 이젠 갈라진 혓바닥으로 무슨 말을 하나 / 비야, 제발 부탁인데 / 치욕 그만 덮어줄 수 없겠니 김희업의 「마른 연못」(시집 『칼 회고전』中에서)의 전문입니다. 볼음도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포클레인의 무한궤도 자국이 선명합니다. 80년도에 축조된 저수지는 35년 만에 처음으로 ‘어떤 물고기도 낳지’ 못하는 치욕적인 상황을 맞았습니다. 해를 이은 지독한 200년 만의 가뭄에 10만평 넓이의 저수지가 온전히 땅바닥을 보였습니다. 바다에 제방을 쌓아 축조한 저수지는 당연히 마을보다 바다 방향으로 갈수록 깊었습니다. 이미지에서 제방 가까이 흰 ..

하지의 못자리

하지가 하루 지난 23일 주문도 진말 들녘 모퉁이 못자리입니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 온 칠월 초순이면 중만생종 벼는 중간물떼기를 하고, 조생종 벼는 이삭거름을 줄 시기입니다. 때가 때인 만큼 검푸르게 짙어가는 녹색융단으로 덥혀있어야 할 논들이 여적 잡풀만 돋은 맨땅 그대로입니다. 강화도는 가뭄과의 전쟁이 선포된 지 햇수로 2년이 되었습니다. 작년 사정도 올해와 매한가지였지만 모내기 2 ~ 3일 전 다행히 100mm의 빗줄기가 밤새 퍼부어 간신히 모내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뿌리를 내린 모들은 따가운 햇살을 탄수화물로 저장시켜 예년에 비해 절반밖에 안 되는 강우량으로 풍작을 이루었습니다. 대중매체가 떠들어대듯 200년 만에 찾아 온 올 가뭄은 더욱 혹독했습니다. 1. 1 ~ 6. 23.까지 제가 사는 주..